슬렁슬렁 동네 한 바퀴

by 기차는 달려가고

지지부진했던 겨울이 뒤늦게 기승을 부리기는 하지만.

봄은 다가오고 있다.

겨울 내내 집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나는,

몸을 쫘악 펴고 팔다리를 쭈욱 뻗으며,

나갈 때가 됐다!

팽그르르 몸을 돌리면서 격하게 봄을 환영하는 것이다.



대단위로 지역을 개발한, 온통 새것뿐인 동네는 그것대로 장점이 있다.

전문가들의 꼼꼼한 계획에 따라

정돈된 조경과 과다한 상업시설 사이에 빽빽하게 주택들이 들어서 있고.

학교, 놀이터, 어린이집, 경로당, 대중교통, 공공기관이 면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단지 주변은 온통 네온사인 십자가들.

반듯반듯, 규칙적으로 배열된 가게들은,

일정한 모양으로, 크지 않은 간판을 가졌는데.

그 색감이나 형태가 꽤 세련되어 차분한 감각을 보여준다.



오래된 지역에 아파트 단지 하나만 재개발된 동네도 있다.

수십 년 동안 이층 집들이 모여 조용한 주택가였던 지역에는 오래된 학교가 있다.

학생들이 활기차게 오가는 대로변에는 규모 있는 3, 4층 건물들이 늘어서 있어서,

병원, 학원, 빵집, 패스트푸드점, 은행 같은 상가를 이루었다.


버스가 다니는 이면도로에는 편의점, 동네 슈퍼, 기사식당, 치킨, 중국음식점, 칼국수집 같은 식당들이 간판을 내걸었고.

그 안쪽 골목에는 주택들 사이사이 점집, 미장원, 방앗간, 부동산, 인테리어 가게, 세탁소들이 있다.

이 가게들은 새로 지어진 상가주택 아래층에 입주해 있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오래된 이층 주택의 일층을 개조한 것이어서 다소 어색한 모양새다.

크기도 제각각, 모양도 제멋대로인 가게들은 저마다 간판도 크게 크게 내걸어,

언뜻 보면 골목은 어지럽기만 하고 개별 상점들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데.

지나치며 찬찬히 살펴보면 제법 끌리는 가게들이 눈에 띄어,

저 집 한번 가볼까, 하는 마음이 일게 된다.



어슬렁어슬렁 장바구니 손에 들고 집을 나선다.

큰길 건너 식사도 파는 빵집에서 바케트 하나 사시고요,

그 뒤쪽 골목의 과일 가게로.

알뜰한 아저씨는 낙찰가가 적당한, 질 좋은 과일만 들이신다.

새로운 게 없군.

망설이다 좀 푸석한 사과 한 봉지, 토마토 몇 개 집어 들었다.


다시 길 건너 이쪽 골목으로 돌아온다.

미장원에는 금발미녀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원통형 간판을 달았다.

몇 걸음 더 오면 빨간 간판을 건 알루미늄 샷슈 미닫이문의 중국음식점.

흠, 이거 제대로 레트로인걸?


방앗간에서는 어슷어슷 썬 가래떡을 한 봉지 산다.

방앗간 집 여주인은 참 싹싹하다.

늘 기계 앞에서 일하는 남편과 가게 안팎을 쓸고 닦는 아내는 사이가 좋아 보인다.


여름 내내 좁은 마당에서 온갖 꽃들을 키워내던 집은 대문이 닫혀있다.

날이 따듯해지면 마당을 활짝 열고 호스로 물을 뿌리시겠지.

그 옆집 담장 위로 보이는 장독대는 날이 풀리면 반짝반짝 안주인의 손길을 받을 터였다.



골목에는 사람이 산다.

사람은 어디에나 살지만,

담장이 있고, 대문이 있으며, 계단 두어 개 뛰어 올라가 현관문을 열고.

방마다 창문에 전등이 켜지면 사람 그림자 어른거리는.

골목에 있는 집들은 바로 '사람'이 살아간다는 진한 실감을 느끼게 한다.

다닥다닥 집집마다 사연은 얼마나 않을까.

이런저런 근심으로 속은 까맣게 타들어갈지 몰라도.

휭휭 찬바람 몰아치는 짙은 외로움으로 하루하루 늙어갈지는 몰라도.

울고, 웃고, 애태우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골목의 집집마다,

아, 사람,

소설책 몇 권은 너끈히 나올 사연을 지으며,

사람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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