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 설렘의 응축

by 기차는 달려가고

여행을 좋아한다.

혼자, 때로는 어머니와 여행을 자주 다녔다.

유명한 곳을 일부러 찾아다니지는 않는 편이다.

체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지도 못한다.

한 자리에 앉아 멍하니 바깥 풍경 바라보기를 즐긴다.

기차 타기를 좋아한다.

그러니 기차 타고 멍청하게 바깥 풍경 바라보는 걸 제일 잘한다.



기차는 도시를 지나고, 전원을 지난다.

멀리 높은 산, 흐르는 강, 다리.

나무들과 풀, 꽃.

그리고 쩌어기, 휘적휘적 걸어가는 한 사람.


가방을 열어 오물오물 육포를 깨문다.

열차의 홍보책자도 조금 보다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끄덕끄덕 졸다가.

보온병의 뜨거운 물을 부어 차도 한 잔 우리면서.

그렇게 정신이 다 깨지 않은 흐릿한 눈으로 이국의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을 사랑했다.

낮과 밤, 그리고 아침을 꼬박 기차에서 보내기도 했었다.

젊었을 적 이야기이다.



어떤 장소에는, 그곳을 지나간 사람들이 흘리고 간 감정의 조각들이 남아 있다.

그 자잘한 조각들이 쌓여서 장소는 특유의 분위기를 갖게 된다.


길을 떠나는 사람.

멀리서 돌아온 사람.

떠나는 자의 설렘이 쌓이고,

당도한 자의 안도감이 모인다, 기차역에는.

들뜬 마음이, 떨림이, 두근거림이.

약간의 염려가, 피로감이, 안도와 기대가.



플랫폼에서 기차에 오르면서.

기차를 내려 천정이 높은 역사를 서둘러 빠져나가면서.

당신의 마음을 넘쳐 나온 설렘은 기차역에 차곡차곡 고인다.

어쩌면 희미하고 어설픈 느낌들이 고이고 쌓여서는 짙고 짙은 농밀한 감정의 결정으로 되어서.

그러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두근거릴 틈도 없이 서두르던 누군가,

출발 시간에 늦지 않아 다행이다,

한숨 돌리는 순간.

설렘 한 조각 사뿐히 다가와 그의 어깨에 얹혀,

콩닥콩닥 가슴을 두드린다.

이봐요, 어디로 떠나시나요?


웅성거리는 사람들, 기차가 곧 출발한다는 방송.

새삼 떨리는 심정으로 플랫폼을 향하면서 왜인지 당신은 대합실을 돌아본다.

그때 당신이 안고 가던 설렘 한 가닥, 그곳에 남는다.

등을 보이며 당신이 떠난 뒤에도 당신을 두드렸던 상기된 감정은,

다시 누군가의 마음을 따라나설 때까지

기차역을 서성이겠지.



기차역을 좋아한다.

깜빡이는 검은색 전광판과 유리벽 안쪽에 매표소.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부자연스러운 목소리.

높은 천장과 딱딱한 의자들의 건조한 풍경.

가방을 들고 경쾌하게 대합실을 가로지르는 사람들과 그들의 들뜬 표정을 좋아한다.


물끄러미 기차 시간표를 쳐다보고.

행선지를 살피면서.

어디론가 떠나볼까?

일상에 얽매인 생활인은 갑자기 방랑자의 마음이 되어서는.

자유라는 그리움.

먼 곳이라는 판타지.

길게 뻗은 기찻길과 기우뚱 기차에 오르는 승객의 바쁜 동작에서,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욕구로 마음이 몹시 흔들리는 것이다.



기차역에는 우리가 흘려버린 설레는 마음들이 진득하게 붙어 있다.

지극히 기능적으로 지어진 직선의 기차역에는,

천정에도, 벽에도, 기둥 사이 어두운 틈에도.

수많은 지문들이 들러붙은 자판기들에도.

감정의 바다가 출렁거린다.

역사를 온통 채워버린 응축된 설렘은

역에 들어선 당신의 발걸음을 따라 벌떡 일어나,

당신의 마음속으로 달려들어 온다.

그래서 기차역에 들어서는 것만으로 우리는 설레고 들뜬 마음이 되는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부엌을 빌려드립니다.]1- 4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