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이야기- 4. 우리가 켠 작은 불꽃.
흥은 점점 고조되었다.
'우왕좌왕' 님의 멜로디혼 연주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계속해서 '우왕좌왕' 님은 HAPPY BIRTHDAY를 다양한 선율로 변주하며 연주를 이어갔다.
멜로디혼으로 이런 음악이 가능해?
깜짝 놀라면서 흥부자 친구들은 까르르,
어깨춤을 추며 발장단을 맞추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쿵덕쿵덕 비트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밥그릇을 나르며 스웨~그,
국그릇을 옮기며 오, 애, 오.
한껏 들뜨고 신나서
지역 특산주를 보내주신 자비로운 분께 "고맙습니다!",
크게 외치며 서로서로 잔도 부딪쳤다.
음식은 맛있었다.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지만.
하여간
음식은 맛있다, 마음은 즐겁다,
아, 행복하닷!
하하, 호호,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전등을 끄고 촛불을 켠다.
들썩거렸던 분위기가 차분해진다.
따끈한 차와 생일 떡을 앞에 두고 누군가가 말한다.
그동안 힘든 얘기, 답답한 마음은 많이 이야기했는데,
우리 소망도 나누어 보면 어떨까요?
깊은 한숨, 후.
계속 실패하고 좌절하면서 뭔가를 꿈꾸고 바라는 건 포기했어요.
더는 상처 받지 않겠다는 자기 방어겠죠.
그냥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자,
비루한 현재를 가리기 위해 미래라는 불확실한 진통제는 쓰지 말자,
혹시라도 희망이 스멀스멀 피어날까봐 눈을 딱 현실에만 고정시키려 해요...
저도 비슷해요.
마지못해 일하고, 할 수 없이 움직여요.
제 마음은 벽을 쌓아버렸어요.
그 어떤 실망에도 더는 흔들리지 않으려고요.
연애 실패,
친구들이나 가족이랑도 삐그덕거리고.
내 탓이죠.
이 황량한 마음에 촉촉한 비가 내려서 의욕과 소망이 자랐으면 좋겠어요.
그게 지금 막 떠오른 제 소망입니다.
아까 음식 준비하면서 내 처지에 요리는 사치라고 생각했었는데요,
멀지 않은 미래에 제대로 된 부엌을 갖고 싶어요.
부엌에서 콧노래 부르면서 음식 하고,
그릇 반짝반짝 씻어놓고, 밥해서 나눠먹고,
그렇게 살고 싶네요.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겠죠.
내가 여기서 뭘 더 해야 할까요?
...
제 직장이 탐욕, 이기심, 허영 같은 인간의 부정적인 측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라,
저는 인간이나 세상에 대해 아주 환멸을 느꼈거든요.
얼마 전까지는 이번 생은 망했다, 나 혼자 홀가분하게 살다 가야지, 했었어요.
그런데 요새는 사랑하는 사람과 다정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정말 강해져요.
사는 게 더 무서워졌달까.
혼자서 이 거친 세상을 잘 헤치고 나갈 자신이 없어요.
마음 맞는 사람 만나서,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서 손 꼭 잡고
같이 어둠의 동굴도 지나고,
악마의 계곡도 건너서,
빛의 평원에 이르고 싶습니다.
격하게 끄덕끄덕.
많이들 바라죠.
그치만 꿈이겠죠?
오늘도 저는 몸 아픈 거 얘기하고 저로 인한 부모님의 근심 때문에 마음이 더 힘들다고 하소연했어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제가 병 문제로 힘들어만 했지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그리 열심히 찾지 않았다, 는 반성이 드네요.
독립하고 싶어요.
부모님의 걱정스러운 시선에서 벗어나 부족하지만 스스로 생활을 꾸려보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 생활비도 벌고 싶고요.
자립이 최종 목표입니다.
손을 잡는다.
꼭 이루시길요.
직장 그만두고 세계 여행을 떠날 거예요.
지금까지 내가 뭘 원하는지,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내가 이 세상 어느 위치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없었더라고요.
그냥 성적 맞춰 대학 가고, 스펙 따서 취직했어요. 이대로라면 직장생활을 지긋지긋해하면서도 대출받아 집 사고,
적당한 상대 만나 결혼하고 부모가 되겠죠.
자동으로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에 나도 모르게 올라 탄 것 같아요.
더 이상 내 인생을 진행하기가 겁이 나요.
일단정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세상과 나를 파악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절실해요.
여행이 답은 아니지만 내 갈 길을 탐색하는 기회가 꼭 필요해요.
올해 안으로 떠날 거예요.
우선 '들꽃' 님 할머니 건강 회복되시기 바라고요,
할머니 더 좋은 환경에서 치료받고 심신이 편안해지시길 소망합니다.(모두들 격하게 박수)
할머님 얘기에서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게,
성품이 온유하시고 선하셔서 '들꽃' 님 어린 시절이 참 포근했다는 거랑,
할머니가 인간적으로 훌륭한 분이어서 '들꽃' 님이 어른이 되어서 할머니를 더,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상대방의 마음이 안심하고 내 안에 자리 잡으려면 우선 내 마음이 따듯하고 착해야겠구나,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합니다.
이해타산이 아닌 진정한 사랑이라면.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야 하는 거지,
억지로 빼앗거나 우격다짐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요즘 감정 기복이 심한데, 반성합니다.
좋은 사람, 성숙한 어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요.
정말 좋아서 음악 했어요.
고생이 고생인 줄 모르고, 열심히 연습하면 나도 저렇게 연주할 수 있겠지,
내가 진심으로 곡을 쓰면 다른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겠지,
그런 희망으로 밤새 연습해도 힘든 줄 몰랐어요.
지금은 완전 무기력해서 실패만 곱씹고 있네요.
제 한심한 처지를 이제야 깨닫습니다.
더는 매달 나가는 방값, 먹는 거, 차비에 전전긍긍하면서 음악을 못하겠어요.
그런데, 그런데도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한 번만 더 제대로 해보고 싶다,
한 번만 더 기회를 가져보면 어떨까, 아우성이에요.
음악을 계속하는 게 소망인지,
돈 벌어 생활의 안정을 찾는 게 소망인지 저도 헷갈려요.
일제히 한 목소리로 외친다.
해야 해!
해야 해!
음악 계속해야 해!
(요구만 하려니 염치없지만)
음악 천재는 음악을 하라!
할머니가 얼마나 더 사실지 모르겠어요.
일을 더 해서 시설이 더 나은 병원으로 할머니를 모실지,
그 시간에 할머니 더 보살펴 드릴지, 갈팡질팡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막연하게 억울하다, 속상하다, 하는 마음이 가득했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부정적인 감정 하나도 없이
할머니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는 각오예요.
제가 편안하고 순한 마음이어야 우리 착한 할머니가 손녀 걱정을 놓으시겠지요.
제발 우리 할머니 편히 모시게 해 주세요.
아, 제발요.
다들 간절해진다.
모두가 한없이 다정한 마음이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면 곧 안개처럼 슬픔과 우울이 존재를 휘감겠지만,
이 자리에서는 그저 착하고 부드러운 마음이었다.
이런 자리 계속 만들어요.
또 모여요, 우리.
음.
다들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미련, 놓치기 싫은, 더 붙들고 싶은 안타까움.
들꽃님이 입을 열었다.
굉장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 진행되었습니다.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전혀 몰랐던 우리가 함께 음식을 만들고,
이렇게 솔직하고 진지하게 고민을 나눌 수 있다니요.
제가 우울과 슬픔의 늪에 빠져 있을 때.
'하마 선장'님의 제안은 캄캄한 동굴에 켜진 작은 촛불이었어요.
오늘 이 자리는 그 촛불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그림이에요.
저는 오늘 이 시간을 잘 간직하고 싶어요.
때때로 꺼내 보는 나만의 보물로요.
필요하면 누군가 손을 들어 오늘 같은 자리를 또 마련해요.
새로이 만나는 이들과 아름다운 시간을 또 만드는 거죠.
다른 누가 말을 이어받았다.
아침이 되면 또다시 각박한 현실에 짓눌리면서,
불안과 걱정이 내 영혼을 갉아먹겠죠.
실망은 나를 무너뜨리고 희망을 짓밟겠죠.
오늘 우리가 누렸던 공감과 배려는 죽음에 이른 성냥팔이 소녀의 환상 같아요.
내일이면 잊어버릴.
그래도 저는 오늘 우리가 가졌던 서로에 대한 이해와 선의가 우리를 조금이라도 보호해줄 것이라 믿어요.
우리가 원한다고 금세 내가 막 훌륭해지고,
세상이 낙원이 되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그저 고통에 짓눌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뭔가를 해볼 수 있겠다는 용기는 주겠죠.
미리 얘기했던 대로 기념사진은 찍지 않았다.
개인적인 사연들은 깨끗이 잊는 거다.
모두 휴대폰을 들어 동시에 단톡 방을 폭파했다.
그리고 서로를 안아주었다.
진심으로, 자신의 응원이 서로의 마음에 그대로 닿기를 바라며.
나의 축복으로 우리 모두 힘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덧붙임- '하마 선장'의 후기
즐겁게 음식을 만들고 행복하게 밥을 먹었다.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뒤처리는 깔끔했다.
다시 원래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공간이 뭔가로 채워져 있는 것 같다.
단순한 여운인가?
마음을 활짝 열어주어 고마웠다.
좋은 음악이 있어서 더 좋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내민 격려와 선의는 우리가
세상이라는 혹독한 추위를 견딜 때 온기가 되어주겠지.
고통 가운데 가만히 서있습니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 했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포기할 수는 없지요.
주저앉을 곳도 없으니까요.
우리는 평생 잃기만 하는 삶을 살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자기 인생을 되는대로 내팽개칠 수는 없잖아요?
뭐든 힘껏 해야죠.
손에 성공을 움켜쥐지는 못해도
더 큰 '나', 더 깊은 '나', 더 나은 '나'가 되고 싶다는 기대는 있으니까요.
오늘 여기,
부드럽고 따스한 공기가 흘렀고
우리 사이에는 공감과 배려, 위로와 격려가 넘쳤습니다.
그걸로 됐어요.
오늘 우리가 느꼈던 벅찬 마음으로
다른 시작을 기대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