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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Feb 24. 2023

세상에서 멀어지다

책을 기록함

<벤야멘타 하인학교 : 야콥 폰 군텐이야기> 

로베르트 발저, 홍길표 옮김, 문학동네.           

     


스위스 태생의 작가 로베르트 발저를 알게 된 것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제발트의 책을 통해서였다.


로베르트 발저가 남긴 흔적은 너무나 희미해서 바람이라도 한 자락 불면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다. 적어도 1913년 초 스위스로 돌아온 뒤부터는, 아니 실제로는 아주 처음부터 그는 세상과 더없이 덧없는 방식으로만 관계를 맺어왔다. 그는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했고 아주 적은 재산 한 푼 가져본 적이 없었다. … 심지어는 작가로서 집필을 위해 필요한 도서는 단 한 권도, 내가 알기로는 본인이 쓴 책조차 한 권 없었다. 그가 읽은 것은 대부분 빌린 것들이었다. 그가 사용한 종이 또한 남이 사용한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아무런 물질적인 소유 없이 평생을, 또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서 살았다.

<전원에 머문 날들>     

W.G. 제발트, 이경진 옮김, 문학동네, (149, 150쪽)



이번에 소개하는 로베르트 발저의 소설은 여러 가닥의 이야기를 갖고 있으며 내용이 단순하지 않기에 짧은 글로  작품을 모두 이야기할 수는 없다.

문장만 소개하는 일은 원래의 작품을 훼손할 수도 있고,

작가의 의도를 오인할 수도 있어 꺼려지지만.

로베르트 발저가 가진 세상과의 '덧없는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되어,

보통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 처한 입장을 보여주는 문장 몇 개만 소개하겠다.

(내용이 그것만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로베르트 발저는 몰락한 집안 형편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다가,

1905년 베를린에서 하인 업 과정다녔다

지금 우리가 하인이라는 단어에서 느끼는 뉘앙스는 당시 하인의 직업적 위상과 차이가 있을 것이다.

당시 귀족 집안의 하인은 체계를 가진 엄연한 직업이어서 지금으로 치면 호텔이나 비행기에서 고객 상대로 일하는 서비스직과 오히려 비슷할 것 같다.

 일을 표시하는 용어 자체가 귀족 집안의 하인 직종에서 그대로 승계받은 것이니.


작가는 하인 직업 과정을 다니면서 일벌처럼 미약한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인생을 떠올렸고.

결코 순치될 수 없는 자신의 독자적인 인생을 모색했었나 보다.

체제에의 응 아니면 제로(0)라는 갈림길에서,

작가는 약간의 자유를 위해 고난을 감당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없다. 우리들, 벤야멘타 학원의 생도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미를 둔다. (7쪽)


우리는 매번 같은 것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 모든 하찮은 것들, 우스꽝스러운 것들 뒤에 비밀이 감춰져 있을지도 모른다. 우스꽝스러운 것들이라? 벤야멘타 학원에 소속된 우리 소년들에겐 우습다고 느껴지는 일이 없다. 우리의 얼굴 표정과 태도는 너무나도 진지하다.  … 우리 생도들은 대체로 웃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이제 우리가 웃으려야 웃을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웃음을 위해 필요한 쾌활함과 느긋함이 우리에겐 없는 것이다.     

 (10쪽)


무슨 일을 하든 우리 훈련생들은 그것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한다. 왜 그것을 해야만 하는지, 그걸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이 모든 사념 없는 복종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이 복종한다. 우리가 그 일들을 해내야만 한다는 사실이 과연 합당하고, 정당한가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일을 수행한다. (40쪽)


복종하는 자들은 대부분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과 똑같이 보인다. 하인은 주인의 얼굴 표정과 태도 들을 충실하게 증식하기 위해 그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63쪽)


우리가 위대하지 않다는 것을, 그것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는 법칙, 우리에게 가해지는 강요, 그리고 우리에게 나아갈 방향과 취향을 말해주는 수없이 많은 냉혹한 규정들, 그들이 위대한 것이다. 우리, 우리 학원생들은 위대하지 않다. 그러니까 우리는 단지 작고, 가난하고, 종속된, 끊임없는 복종의 의무를 진 난쟁이라는 것을 누구나, 심지어 나까지도, 느끼고 있다. 우리는 또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순종적으로, 하지만 지극한 확신에 차서. 우리는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어느 정도는 열정적이다. 우리가 미미한 존재라는 사실과 우리가 처해 있는 극도의 빈곤 상태가 자신이 이루어낸 몇몇 성과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겸손함이다. 만약 우리가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작은 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 작은 젊은이들은 그 무엇이기는 한 셈이다. (71, 72쪽)



로베르트 발저의 글에는 기백이 있지만.

읽고 나면 슬픔이 남는다.

며칠씩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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