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 수도원>
글과 사진 니콜라스 판, 허유영 옮김, 컬처북스
대만계 사진작가인 지은이는 가톨릭 신자이다.
수도원의 초청을 받아 몇 달 동안 프랑스 리용 인근 "라 투레트 수도원"에 머물면서 사진을 찍고 글을 썼다.
그래서 이 책이 탄생될 수 있었다.
라 투레트 수도원은 20세기 유명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를 맡은 곳으로 거의 '건축의 성지'로 알려진 곳이다.
여러 각도에서 건물을 찍은 사진들을 훑어보아도 좋고,
글을 찬찬히 읽어도 좋은 책이다.
진지하고 성실한 이 책을 통해서 나는
건축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
예술과 종교,
르 코르뷔지에라는 건축가,
종교의 혁신과 사회 개혁 문제 등 여러 주제에 관해 알게 되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용이 풍부하여 두 번에 나누어 책을 소개하려 한다.
먼저 건축에 관하여.
이 책을 추천하는 건축가 승효상은 이렇게 글을 시작한다.
건축 설계라는 일은 우리가 사는 방법을 조직하는 것이고 그 조직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게 공간인데, 불행하게도 공간은 보이는 게 아니라서 그 공간을 형성하기 위해 둘러싼 껍데기일 뿐인 외관을 건축으로 보통들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건축이 본질은 어디까지나 공간에 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체험을 통해서다. 그래야 그 공간이 조직된 방식과 그 속에서의 삶을 알게 된다. (16쪽)
가톨릭 신자로서 20년 전에 이 건물을 처음 보았을 때 지은이의 소감은 이러했다.
전위적이고 독특한 건축 양식과 일체의 장식을 배제한 라 투레트 수도원은 내게 철판 위를 걷는 듯한 생경함과 당혹감으로 다가왔다. 이 건축물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더라면 상자처럼 네모반듯하게 생긴 이 건물을 기숙사나 사무용 건물로 착각했을 것이다.
(32쪽)
지은이가 당황했을 정도로 이 수도원 건물은 지금껏 지어졌던 종교건축물과 많이 다르다.
보통의 수도원들은 주 건물까지 가지 않아도 정원의 조각상과 성당의 첨탑만 보아도 성지에 온 것 같은 최면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울창한 숲 속에 은밀히 숨겨진 라 투레트 수도원의 드넓은 정원에서는 종교적인 색채를 띤 그 어떤 장식품도 찾을 수 없다. 운이 좋으면 수사들이 영원히 잠들어 있는 무덤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도 나무 십자가만 덩그마니 꽂혀 있을 뿐 특별한 종교적 분위기는 느낄 수 없다.
(35쪽)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무신론자였다.
일을 맡지 않으려는 고집쟁이 건축가에게 수도원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굳이 설계를 의뢰한 수도원의 쿠튀리에 신부는 예술적 안목이 뛰어난 분으로,
꽉 막힌 고리타분한 종교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쿠튀리에 신부는 라 투레트 수도원의 설계를 의뢰하면서 르 코르뷔지에에게 단지,
“조용하며,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을 부탁했고.
가톨릭 수도원의 건축가가 무신론자라는 사실만 집요하게 묻는 기자에게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가로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또 쿠튀리에 신부는,
“우리와 사상과 신앙이 다른 예술가들이 우리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들의 창작을 통해 우리는 오백 년 동안 그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위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137, 138, 139쪽)라며 르 코르뷔지에를 지원했다.
지은이가 보는 라 투레트 수도원 건물은 이렇다.
… 종교를 상징하는 장식품들로 가득 차 있는 여느 성당들과 달리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성당은 그저 속이 텅 빈 시멘트 상자일 뿐이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없지만 성당 내부에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깔의 빛이 곳곳에서 새어 들어와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한다. 절기에 따라 변하는 빛은 마치 신이 만들어 내는 기적처럼 신비하고 눈부시게 찬연하다.
(208쪽)
그곳에 머물면서 지은이는,
수도원 설계를 의뢰했던 쿠튀리에 신부의 뜻처럼 고요함을 한껏 누릴 수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새벽, 언덕 위로 날아가는 새들의 날갯짓 소리까지 들릴 만큼 고요했다. 상공을 떠도는 빛이 없다면 시간이 멈추었다고 해도 믿을 것이었다. 특히 수도원 성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는 언제나 나를 시간이 멈춘 듯한 아름다운 착각에 빠뜨렸다. (31쪽)
그렇게 몇 달,
수도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지은이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그제야 ‘종교’와 ‘예술’이 근본적으로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임을 깨달았다. 수사들의 번잡하고 불필요한 기도와 찬미든, 르 코르뷔지에가 심혈을 기울여 설계한 건축물이든, 길은 다르지만 종착역은 모두 같다.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내면을 충실하게 하고 ‘영혼’이라 불리는 곳에 영감과 자양분을 부여하는 것이다. (176쪽)
그렇다.
나는 이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진실된 무언가를 추구하고 기도하는 것은 영혼을 키우고 충실하게 살아가기 위함이지,
현세의 복록을 얻으려는 수단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