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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Mar 08. 2023

낙동강은 알고 있다

책을 기록함

<김정한소설선집> 중, 

단편 [모래톱 이야기]

김정한 글, 창작과 비평사,



지난 부산 여행에서 범어사에 갔던 날,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주택가 골목에 <요산 기념관>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보았다.

가물가물,

"요산"이라는 호를 가진 사가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장 휴대폰을 열어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매우 피로했기에 그냥 그곳을 떠났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아, 소설가 김정한 선생 기념관이었구나.



내가 닥치는 대로 책을 읽던 10대, 20대 시절에 이미 노작가였던 선생은,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 활동을 하고 계셨다.

나는 그분의 작품은 다 찾아 읽었고.

내가 역사 인식을 갖게 되는데 그분의 작품들이 분명히 역할을 했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선생의 책을 찾았는데,

나의 기억에서 가물가물 해졌듯 도서관에서도 뒤로 밀려난 터라.

서고에 잠들어 있던 책을 찾아서 다시 도서 등록 과정을 거쳐 책을 빌릴 수 있었다.

현재의 "창비"가 예전 "창작과 비평"이라는 이름을 쓰고 아현동에 주소지를 두었던 시절에 출판된 낡은 책.

 

하지만 곧바로 책을 읽게 되지는 않았다.

일제 강점기부터 독재 시절을 살아오시면서 와세다대학 시절 외에는 줄곧 부산 지역에 거주하셨던 작가는,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들을 쓰셨기에.

일제 강점기 때나 해방 이후나,

걸핏하면 구속과 체포, 구금과 해직 같은 고초를 겪으셔야 했다.

작품들도 암담한 이 나라 백성들의 고난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니.

 고통스러운 기록들을 마주할 마음의 준비가 도통 안 되는 거였다.



1940년쯤 작품 활동을 그만두었던 작가는 1966년 이 작품을 내놓았다.

자신의 제자가 겪은 사연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을 느끼셨겠지.

당시 김해 명지면,

낙동강 하류, 강 한가운데에 주머니처럼 길쭉한 조마이섬이라 불리는 모래톱이 있었다.


백 년, 아니 몇 천년 갖은 풍상과 수를 겪어오는 동안에 모래가 밀려서 된 나라 땅인데, 일제 때는 억울하게도 일본사람의 소유가 되어 있다가 해방 후부터는 어떤 국회의원의 명의로 둔갑이 되었는가 하면, 그 뒤는 또 그 조마이섬 앞강의 매립 허가를 얻은 어떤 다른 유력자의 앞으로 넘어가 있다든가 하는- 그런 형편이었다.

(144쪽)


제자는 나룻배를 타고, 버스로 갈아타고, 또 걸어서

빨라야 두 시간이 걸려 학교에 닿을 수 있다.

가정방문을 하게 되어 선생은 제자의 할아버지로부터 땅을 빼앗길 처지에 놓인 마을 사정을 듣게 되고.


이 꼴이 되고 보니 선조 때부터 둑을 맨들고 물과 싸워가며 살아온 우리들은 대관절 우찌 되는기요?”    

큰 도둑질은 언제나 정치하는 놈들이 도맡아 놓고 한다는 게 서두였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동포애니 우리들의 현실정이 떠니를 앞세우겠다!(155쪽)


할아버지는 화자에게 섬의 진짜 이야기를 써달라 부탁한다.

동강 물이 파아랗니 푸르니 어쩌니…”(157쪽),

하는 썩어빠진 글이 아니라 진실을 말이다.



책 뒤에는,

'허덕이며 보낸 인생- 나의 작가적 자서전'(479쪽)-이라는 작가의 짧은 글이 있다.

 1908년 생인 선생은 문학의 길에 들어선 배경에 대해,


문학을 해 보겠다고 엄두를 낸 동기부터가 … 식민지 청년으로서 민족 해방을 위한 비밀결사 같은 데 들어가서 계속 일을 해 볼 용기가 모자랐기 때문에 결국 문학에 기울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 내 경우는 하불실 문학을 통해서라도 민족적 감정을 배앝지 않으면 생(生)의 구차스런 보람을 느끼지 못할 거 같아서 그랬으리란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479쪽)



할아버지는 감옥으로 끌려가고,

어머니와 아들은 빈손으로 섬에서 쫓겨나,

부산, 경남 지역의 수재만 모인다는 학교도 다닐 수 없게 된 제자.

그 비극을 깔고 권력을 낀 모리배는 공짜 노동력인 군대를 동원해 섬을 땅으로 바꾸고 있었다.



현재 고층아파트들이 늘어선 땅은 과거를 묻었을지 몰라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은 그 슬픈 사연을 알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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