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밤거리

by 기차는 달려가고

보스턴에도 갔었다.

역사가 짧은 미국에서 그중 오래된 도시인 보스턴은,

근대 시기 유럽 같은 건축물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널찍널찍한 길과 도시 한가운데 있는 서늘한 공원의 굵은 나무들 사이를 걸으면서,

장중하고 차분한 도시가 꽤 마음에 들었다.



바다로 튀어나와 있는 케네디 대통령 기념관에 간 날은 폭풍과 폭우가 기승을 부렸다.

퍼붓는 비를 맞으며 버스에서 내려 건물로 뛰어들어갔는데,

유리창 밖으로 들이치는 시퍼런 파도가 거셌다.


하버드 대학에도 갔던 기억이 있다.

학교 부지가 상당히 넓더라.

기분 탓인지 길에서 보는 백팩을 멘 청년들이 똘똘한 눈빛을 가졌다는 느낌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대체로 깔끔한 차림새.


근대기 주택 건물들이 있는 지역은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좋은 분위기에 취해 두리번두리번 걷다가 갑자기 다른 세상인 듯,

인종도, 주택들도, 분위기도 급변해서 놀랐다.

부유한 보스턴의 또 다른 면이었다.



나는 유스호스텔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그러니까 1990년 대 초에 우리나라에서는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버클리' 캠퍼스만 알려져 있던 시절이었다.


숙소 길 건너, 석조 건물 앞을 서성거리는 학생들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아서

건물에 붙은 이름을 들여다보니 '버클리 음악학교'라고 쓰여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버클리 음악 학교가 유명하다는 걸 알았다.



여행지에서 늘 그렇듯 나는 아침에 나가 부지런히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오후에는 숙소로 돌아와 쉬었다.

나는 독방을 썼는데,

그 유스호스텔은 규모가 좀 컸다.

저녁에 지나다 보면 아래층 꽤 넓은 식당 공간에는 젊은 여행자들이 꽉 차있었는데.

조용히 책을 읽는, 마치 대학 도서관 분위기였다.


저녁에 혼자 방에 있다가 나도 여행안내서를 들고 식당으로 가서 여행 계획을 짰다.

하다 보니 지루해져서 로비로 나왔는데

내가 들고 있는 한국어 여행안내서를 보고,

한국분이셨구나, 어제도 봤어요.

한국 청년들이 반갑게 말을 붙인다.


한 친구는 미국에서 공부 중이고,

유럽에 있는 친구가 미국에 와서 두 친구가 함께 여행 중이라고.

오늘 밤에 어디서 음악회가 있다는데 같이 가실래요?

아, 좋지요.



유스호스텔에 머물던 젊은 여행객 수 십 명이 우르르 어깨를 부딪치며 보스턴 밤거리를 함께 몇 블록 걸었다.

여행을 가면 거의 해 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오는 나로서는,

아주 드물게 경험하는 밤거리였다.

대도시인지라 큰길에는 차량들의 헤드라이트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높은 건물들은 어두컴컴하게 도시의 배경이 되어 있었다.

어느 평범한 건물에 도착해 지하에 있는 뻥 뚫린 빈 공간으로 들어갔고.

작은 돈을 내고 음료수 한 컵씩을 골랐던 것 같다.

각자 접이식 의자를 들고 홀에 들어가 적당히 줄 맞춰 의자를 펴고 앉아,

딱히 무대랄 것도 없는 앞자리 빈 공간에 조명이 들어오고 악기가 배치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모양이 흐트러진 일상적인 옷차림을 한 밴드는 열심히 연주했다.

화장기 없는 젊은 여자 보컬은 짧은 치마를 입고 노래했는데,

음악이 썩 훌륭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분위기는 흥겨워져서 으쌰 으쌰,

청중들은 열렬히 박수도 치고 껄껄껄 웃기도 하면서.

밴드와 청중들은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루어냈다.



다음날 짐을 들고 유스호스텔을 막 나서는데 차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창을 내리더니 나를 부른다.

어젯밤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한국 청년들이었다.

차 안에는 여러 명이 타고 있었는데,

유스호스텔에서 알게 된 그 몇 명이 차를 빌려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고.

"같이 가실래요?" 물었다.

한 30초 생각했던 나는,

그냥 계획했던 대로 혼자 가겠다고 대답했고,

우리는 서로의 일정을 축원하며 각자 길을 떠났다.



지금은 그 밴드 멤버들도 50대에 접어들었겠다.

음악을 함께 듣던 유스호스텔의 젊은 여행자들도,

우여곡절 인생의 바다를 지나 비슷한 나이가 되었겠지.


밴드들은 아직도 음악을 하는지.

젊은 시절, 열정을 쏟아 추구했던 그 무엇을 여전히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지.

구비구비 쉽지 않은 인생길에 노래가 다정한 친구가 되고 따듯한 위로가 되었기를.

그래서 깊이와 넓이를 가진 인생의 노래를 아름답게 부르며 행복하기를 바란다.



청춘은 가고 노인이 되어간다.

지구 위를 살다 간 수많은 생명들처럼

먹이를 구하고, 사랑을 바라면서.

기뻐하고, 슬퍼하고, 그리워하고 또 지루하거나 괴로워하면서.

위기를 겪고, 고비를 넘기고, 어쩌다 오는 환희의 순간을 가슴 벅차 하면서.

공들여 자신의 인생길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룬 것이 있어 뿌듯한 마음이고.

누군가는 모든 것을 잃고 거친 밤바다에 뛰어들까,

바닷가를 서성일 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

인생은 매 순간이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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