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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Mar 13. 2023

풍랑 속 조각배 하나

책을 기록함

<벤야멘타 하인학교, 야콥 폰 군텐이야기>     

로베르트 발저, 홍길표 옮김, 문학동네.



전에 소개했던 로베르트 발저의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앞글에 소개한 화자의 이야기만 아니라 여러 인물형이 묘사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내가 사회부적응자가 아닐까?' 하는 고민을 안고 있을 것이다.

종종 자신의 나약함과 과민을 탓하며 술로 신경을 잠재우려 들겠지.

학원 동급생 샤흐트는 취직을 했다가 사흘 만에 되돌아왔다.

샤흐트는 그 며칠 동안 하인 일을 하면서 겪은 괴롭힘과 심술궂음, 고된 노동의 설움을 쏟아놓는다.

화자는 이렇게 쓴다.


난 샤흐트가 하는 말을 믿는다. 아주 기꺼이. 그것은 말하자면 그가 하는 말을 나는 무조건 사실로 믿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병약하고, 감수성이 강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칠고, 독재적이고, 변덕스럽고, 잔인한 곳이기 때문이다. 샤흐트는 당분간 다시 이곳에 머물게 될 것이다. … 나는 그가 스무 번의 실망을 차례차례 겪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인정사정없는 법칙이 따르는 인생은 어떠한 사람들에게는 끊임없이 좌절과 끔찍스럽고  흉악한 인상의 연속일 뿐이다. 샤흐트 같은 사람들은 계속 고통스러운 혐오를 감수하며 살아갈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는 인정받고 환영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가혹하고 매정한 일들이 그에게는 열 배 더 가혹하고 매정하게 일어나고, 그는 그것을 남들보다 더 예민하게 느낀다. 불쌍한 샤흐트, 그는 어린 아이다. 그는 선율에 흠뻑 빠져서 선하고, 부드럽고, 태평스러운 것들 사이에 둘러싸여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를 위해 시냇물은 은밀하게 흐르고, 새들도 은밀히 지저귀어야 한다. 저녁하늘에 떠 있는 담색의 부드러운 구름이 그를 안아서 ‘아아,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의 왕국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 그의 손은 가볍게 손사래를 젓는 데 딱 어울리는 손이다. 일을 할 만한 손이 아니다. 그의 앞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야 하고, 그의 뒷전에서는 달콤하고 친절한 목소리들이 소곤대야만 한다. 그의 눈은 행복하게 감겨 있을 수 있어야 한다. 아침에 푸근하고, 관능적인 이부자리에서 눈을 떴을 때 아늑하게 다시 잠들 수 있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그에게 맞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일이, 그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 그에게는 부적당하고, 부자연스럽고,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137, 138쪽)


발을 붙이고 내 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사회는 결코 친절하지 않다.

누구도 나를 쉽게 환영하지 않는다.

뻘쭘하고 민망한 그 상황에서 거칠고 황량한 대지를 가꾸고,

적의와 질시와 심술궂은 시선을 받으며 생글생글 악수를 나누어야 한다.


이곳 벤야멘타 학원에서는 상실감을 느끼는 법과 견디는 법을 배운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능력,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훈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유능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저 덩치 큰 아기, 칭얼대기만 하는 울보로 남을 것이다. 우리 훈련생들은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 삶의 희망들을 가슴속에 품는 것이 우리에게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103쪽)



어린아이처럼 내게 좋은 세상을 내놓으라고 떼쓰는 건 아니다.

다만 세상에서 하나의 노동력으로 그저 소모되어 가는 인생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삶의 고난을 선택한 화자에게 선생님은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


… “우리는 지금 가난과 결핍이라는, 둥근 천장의 통로에 와 있다. 사랑스러운 야콥, 너는 평생 가난하게 살게 될 거야. 그러니 지금 이곳을 가득 메우고 있는 어둠, 차디차고 고통스러운 냄새에 얼마간 적응하려고 해 보아라. 놀라지 말고, 화내지도 마. 신은 이곳에도 존재하는 법, 신은 도처에 있다. 필연성을 사랑하고, 돌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축축한 바닥에 입을 맞춰다오, 부탁이다. 그래. 그렇게 해. 그것은 네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고난과 슬픔에 기꺼이 복종하겠다는 마음의 증거를 보여주는 일이란다.”

(112쪽)


평생 물러나고 회피하더라도 풍파는 따라오고.

울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만 칠 수는 없다.

나를 찌르는 그 날카로운 가시들을 가슴에 품으면서 어른이 되어간다.

아, 어른이 된다 함은 가슴에 셀 수 없는 상처를 긋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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