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형제 민담집> (김경연 옮김, 현암사)
부모, 그중에서도 어머니는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지만,
모든 어머니들의 헌신이 다 순수한 사랑과 책임감만은 아니더라.
사랑이 포함은 되겠지만,
워낙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은 부모가 된다고 그 성정이 어디 가는 건 아니어서,
자식에게도 이기심과 탐욕을 어김없이 발휘한다.
자신의 열등감과 욕심을 자식에게 투영하여 자식이 불행하건 말건 욕망의 도구로 쓴다거나.
자식을 양육하는 대가로 자식을 맘대로 해도 되는 소유물로 여긴다거나.
어제 소개한 <그림 형제 민담집>에는 우리에게 <신데렐라>로 알려진 동화와 비슷한 내용의 <재투성이 아셴푸텔>이 있다.
아셴푸텔의 어머니가 어린 딸을 하느님께 맡기고 죽은 뒤
아버지가 새 부인을 얻었는데.
그 의붓어머니는 두 딸을 데리고 왔다.
악랄한 의붓어머니는 어린 아셴푸텔을 구박하면서 혹독하게 집안일을 시키고.
자신의 못난 두 딸은 호사롭게 키운다.
친딸의 고난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 무심한 아버지.
아셴푸텔에게 못되게 구는 의붓어머니의 성정은 사실 의붓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친딸들을 사랑하는 듯 보이나 표현만 다를 뿐, 아셴푸텔을 대하는 잔인한 태도는 곧바로 두 딸에게로 향한다.
왕자가 무도회에서 벗겨진 황금 신발을 들고 구두 주인을 찾을 때,
의붓어머니는 구두가 맞지 않는 두 딸에게 칼을 주며 말한다.
큰딸에게는,
“엄지발가락을 잘라라. 왕비가 되면 걸을 필요가 없을 게다.”
작은딸에게는
“뒤꿈치를 조금 베어 내렴. 왕비가 되면 걸을 필요가 없을 테니까.”
(154, 155쪽)
그러니까 자식의 행복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한다는 건 자신이 자식 양육을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을 때나 말이지,
자식의 심신을 해치면서까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이루어야 할 무엇이 있을까?
자식이 진정 원하는지,
자식 인생에 도움이 되는지 깊은 고뇌와 검토와 대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남들에게 으스대며 자랑하려고 자식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많은 부모들이 어린 자식들을 성공의 길로만 몰아대는데.
그 결과 마음에는 울분과 화가 가득 차서 무엇에 쫓기는 듯,
열등감과 좌절감으로 증오심을 키우고,
친구를 괴롭히면서 자신을 갉아먹는 억눌린 어린 우등생들이 양산되고 있다.
그들이 자라서 지금 우리가 보는 탐욕의 화신, 무능과 부패의 아이콘인 독재자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인간적인 성숙함과 품위는 전혀 갖추지 못한 무뢰배 말이다.
많은 부모님들이 오늘도 자식에 대한 책임감과 부모 역할에 대한 고민으로 마음이 복잡하리라.
지금 나의 선택이 사랑하는 자식의 발을 자르는 건 아닌가, 늘 조심, 또 조심.
그리고 묻고 또 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