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도릿>
찰스 디킨스 지음, 장남수 옮김, 한국문화사
네 권 분량의 이 소설은 부담 없이 읽힌다.
하지만 종종 책을 덮어야 하지.
인간사의 못나고 흉한 면들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어 한숨을 쉬면서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니까.
찰스 디킨스는 치사하고 가증스러운 인간의 기만적인 심리를 참 단순하고 명료하게 우리 앞에 드러내준다.
어디에나 있는 기만과 위선.
내 마음 편하겠다고 우리는 소중한 사람을 얼마나 못난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가.
이 소설에는 여러 종류의 기만이 그려지는데,
아마 세상 어디서나 흔한 기만은 결혼을 둘러싼 양가의 우열 다툼이리라.
가원 부인은 끈 떨어진 귀족 가문이다.
궁에 얹혀살면서 약간의 연금으로 간신히 체면치레 하는 신세.
하나 있는 아들은 재능도 없이 그림을 그린답시고 빚만 잔뜩이다.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는 제법 유복한 중산층 집안의 외동딸.
딸이 좋아하는 남자가 영 못마땅한 부모는 딸을 데리고 장기 해외여행을 다니는 등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지만.
딸을 이길 수 없어 결국은 사위의 빚을 갚아주고 결혼식을 올려준다.
돈 많은 사돈을 바랐던 가원 부인은,
아들이 좋다니 할 수 없이 신분 낮은 집안과 혼인한다며 한숨을 쉬고.
신분 낮은 사돈을 다시 볼 일 없다는,
젊은 부부에게 도움이 전혀 안 되는 귀족 친척들은 코미디처럼 결혼식 파티를 장식한다.
명백히 하향세에 있던 빅토리아 시대 귀족들의 자기기만은 그 귀족 놀음을 가능하게 해주는 물주까지 우습게 보는 지경이다.
성공한 사업가 머들 씨는 전남편에게서 아들이 하나 있는 부인과 이런 연유로 결혼했다.
위대하고 운이 좋은 이 사내는 충분히 냉정하게 지낼 수 있는 넓은 공간을 원하는 커다란 가슴에게 진홍빛과 황금빛 보금자리를 대략 15년 전에 제공해 주었다. 그 가슴은, 기대서 휴식할 가슴은 아니었지만 보석을 걸어두기에는 썩 좋은 가슴이었다. 머들 씨는 보석을 걸어둘 뭔가를 원했고 그 목적을 위해 그것을 구매했던 것이다. (2권 59쪽)
그런데 머들 씨 부인은 남편을 비난한다.
남편이 상류층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인” 그가 칙칙하게 핏발이 서고 누렇게 뜬 얼굴을 문지르며 반박했다. “그 사실은 나도 당신만큼 알고 있소. 당신이 상류사회를 장식해 주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상류사회를 후원해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당신과 나는 만나지도 않았을 거요. 후원해 주는 사람이란, 상류사회가 먹고 마시고 바라보는 온갖 값비싼 물건들을 제공해 주는 사람이란 말이오. 상류사회를 위해 그 모든 것을 다해왔는데, 내가 상류사회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상류사회를 위해 그 모든 것을 다해왔는데.” 자기 부인이 눈꺼풀을 치켜뜰 정도로 거칠게 강조하며 되풀이했다. “그 모든 것을 다해왔는데- 모든 것을 말이오!- 결국에는 내가 상류사회와 어울릴 자격이 없다고 하다니, 훌륭한 보답이구려.”
“내 말은,” 머들 부인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조금 더 느긋하게 처신해서 그리고 사업에 조금 덜 매달려서 당신 자신을 상류사회와 어울리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당신이 지금 하듯이 업무를 어디나 달고 다니는 것은 명백히 천박한 거니까요.”
(324, 325쪽)
신분과 재물의 만남은 쌍방과실이니 그렇다 치지만,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천사가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경우는 어디에나 있다.
소설의 주인공 '작은 도릿'은 밑바닥으로 떨어져 허세와 자기기만으로 간신히 연명해 가는 도릿 가정의 막내딸이다.
그녀는 한심한 오빠와 이기적인 언니, 정신줄을 놓은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왔다.
그녀는 나이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세 자녀 중에 맏이가 되었고, 영락한 가족의 어른이 되었으며, 가족의 걱정과 수치를 마음속으로 감당했다.
(1권 147쪽)
그렇게 작은 도릿에게서 직접 도움을 받고 그녀의 희생으로 겨우겨우 살아가면서,
다른 식구들은 '작은 도릿'의 노고를 인정하기는커녕 스스로 최면을 건다.
에이미는 다른 가족과 달리 중요하고 현명한 경험을 한 적이 없는, 평범하고 가정적인 작은 아이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집안의 원칙으로 내세우는 것이 그 가족의 관례였다. 가족의 그러한 허구는 그녀의 봉사에 맞서서 다른 식구들이 내세우는 주장이었다. 그녀의 봉사를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2권 37쪽)
에효,
인간의 자기 합리화란,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