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의 세계 그리고 그 세계의 주인

『세계의 주인(The World of Love)』

by 부곡하와이
『버닝』中, 이창동 (출처: FILMGRAB)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여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 지금 내 손에 없는 귤의 존재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귤이 없는 이 현실을 망각함으로써 그 귤을 손에 쥔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방법. 현실의 세계를 잊고 그로써 내가 바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방법인 것이다. 상상이라기보다는 건설. 마술은 이렇게 작동한다.


마술의 세계에서는 거짓이 진실이며 진실이 거짓이다. 그렇게 마술은 현실을 잊게 만든다. 마술사가 자신만의 기술과 연기로 성공적으로 관객을 속여내면 그는 무수한 박수갈채를 받는다. 그의 암막 뒤로 현실은 잊힌다. 충실한 관객들은 마술이 만들어 낸 환상을 좇으며 즐거워하고, 본래 세계의 현실을 뒤로하며 거짓이 놀라운 진실인 양 감탄한다. 환상, 그러니까 거짓에 대한 긍정과 현실에 대한 전략적인 무시, 이것은 하나의 마술 쇼 동안 지켜지는 암묵적인 약속이며, 관객들을 자연스럽게 이끌어갈 수 있는 마술사의 역량이기도 하다. 모두가 마술사를 믿고 이 고루한 현실 세계를 떠나 마술의 환상적인 세계로 가길 바라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이 과정은 마술사도 관객도 모두 힘을 합쳐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세계의 주인』中, 윤가은 (출처: KMDb)

이야기의 주인공 주인은 학창 시절 분명 우리 학교에도 있었을 법한, 또는 내 주변 누군가의 내가 알지도 못하는 그녀의 고등학생 시절 모습이 그랬겠거니 얼핏 상상하게 만드는 아이다. 주인은 그만큼 이 세계에 존재하는 한 사람의 초상화다. 이 아이는 여느 학생들이 그러하듯 가족들과 또 친구들과 교유하며 이 세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나가고 있다. 입가에 미소를 띠게 만드는 마술 같은 이 아이의 명랑한 세계를 바라본다. 그러던 도중, 잘 느끼지 못하는 지진의 전조증상처럼 알게 모르게 작은 흔들림을 주고 있었던 학우 수호가 결국 그 세계를 깨뜨려 버린다.

『세계의 주인』中, 윤가은 (출처: KMDb)

현실의 세계에 꿋꿋이 자리 잡아 숨은 진실을 낱낱이 파헤치고자 하는 사람은 마술의 세계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다. 이 세계에서는 거짓을 부정하고 진실을 추적하는 것이 곧 마술과 마술사, 그리고 세계 자체를 부정하는 꼴이 되는 셈이니까. 수호는, 과거에 있었던 끔찍한 사건이 부재하고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주인의 세계를 흔들어 깨뜨려 버리는 사람이다. 마치 주인의 동생 해인이 학예회 마술쇼에서 실수한 것처럼, 주인의 세계도 조금씩 금이 가다가 결국 깨져버리고야 만다.


그 순간 주인이 만들어내려던 환상의 세계는 깨어지고 참혹한 현실이 그 사이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통상적으로 진실의 드러남은 마치 태양의 이미지에 비유되곤 하지만, 그것으로 상상되는 밝고 찬란함과는 아주 거리가 먼 당황과 혼란으로 뭉개진 순간이 찾아온다. 그 순간은 마치 너무나도 밝아 눈을 꾹 감고 무시하고 싶게 만드는 섬광 같다. 그렇게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관객들에게도 당황스럽지만, 그 누구보다도 혼란스러운 사람은 마술사다. 마술사는 쇼에 참여한 관객 그 누구보다도 진실이 가려진 세계를 꿈꾸기 때문이다.

『세계의 주인』中, 윤가은 (출처: KMDb)

당황의 침묵, 마술사에 대한 불평과 야유, 무마를 위한 우렁찬 박수 소리, 피식하는 웃음, 위로의 “괜찮아”. 마술의 세계가 깨지고 진실이 드러난 순간 나타나는 관객들의 다양한 반응들은 주인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칼날 같은 진실을 벼리기도 하고 보듬어 덮어주기도 하는 다양한 반응들을 그려낸다. 진실, 그것은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이 현실 세계의 존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아주 짧은 순간 동안만이라도 그것이 없었던 것처럼 여기고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아프기에. 그 진실이 없는 환상의 세계도 현실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어떤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진실이 없다는 것, 그리고 주인이 꿈꾸는 사랑 그것만으로도 아무래도 좋은 세계일지 모른다. 그런 주인의 세계와 그 세계로 이끌어갈 마술사 주인을 모든 관객이 바라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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