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보내는 열 일곱 번째 편지
딸아, 얼마 전 우리가 함께 다녀온 제주도 여행이 내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너도 알고 있을까? 그 여행은 단순한 가족 여행이 아니었어. 나에게,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준 소중한 시간이었지.
이번 여행은 너의 따뜻한 제안으로 시작되었어. "엄마는 아직 우리랑 같이 해외여행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잖아." 너의 그 말이 우리를 움직이게 했고, 결국 제주도로 떠나는 계기가 되었어. 바쁜 일상에 쫓기며 해외여행 한 번 못 가본 엄마와 아빠였는데, 네 덕분에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단다. 너는 여행 준비도 누구보다 세심하게 챙겼지. 매일 전화를 해서 필요한 것들을 점검하고, 여행이 가까워질수록 기대에 차 들뜬 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해. 덕분에 아빠도 오랜만에 여행을 기다리는 설렘을 느낄 수 있었어.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단다. 제주도의 공기를 처음 마시던 순간, 이 여행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어. 엄마와 아빠, 그리고 너와 네 동생, 사위까지 함께한 여행이었으니까. 긴 세월을 함께한 가족이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지. 그냥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는 생각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지내온 것 같구나.
여행 내내 엄마는 평소처럼 창밖 풍경을 보며 감탄했고, 너는 카메라로 그 순간을 하나하나 담았어. 우리가 방문했던 명소들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곳이 있단다. '산양큰엉곶'에서 엄마와 네가 함께 사진을 찍던 그 순간, ‘죄명: 너무 예쁜 죄’라는 포토존 앞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활짝 웃던 그 순간,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예뻐 보였어.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로 아름다웠단다. 그런 소중한 시간을 선물해 준 너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하지만, 여행의 마지막 날, 아빠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맞이했어. 제주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예쁜 사진을 남기겠다고 갔던 함덕 해변에서 사고는 일어났지. 파란 하늘과 바다, 그 배경으로 엄마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카메라 화면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그 순간 엄마가 바위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는 거야. 그 순간, 아빠의 심장은 멈춰버린 것 같았어. 아빠 눈앞에서 엄마가 사라졌을 때,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더구나.
혹시라도 잘못되면…
그 끔찍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어. 늘 내 곁에 있을 거라 믿었던 사람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단다. 다행히 큰 부상 없이 병원으로 옮겨졌고, 의사 선생님이 "천운입니다. 1cm만 빗나갔어도 큰일 날 뻔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온몸의 힘이 빠졌어. 네 엄마가 괜찮다는 걸 확인한 순간에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지. 하지만 그 짧은 사고가 내게 남긴 울림은 너무도 컸단다.
36년 동안, 아빠는 엄마가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단 한 순간의 사고가 그 믿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깨닫게 해 주었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영원할 거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어. 아침에 눈을 뜨면 엄마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엄마가 내 이름을 불러 줄 때마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단다.
그날 이후, 아빠는 변했어. 엄마가 기뻐하는 순간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 주고 싶고, 우리의 일상이 아무리 평범해 보일지라도 그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더 많이 쌓아가기로 했단다. 그래서 이제는 엄마의 손을 더 자주 잡고, 사소한 일에도 "고맙다"고 말하게 되었어. 하루를 마칠 때면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라고 인사하는 습관도 생겼단다. 그리고 너희들과의 대화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었어. 작은 말 한마디, 작은 손길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야 알게 되었지.
제주도 여행은 끝났지만, 그날의 깨달음은 내 삶을 바꿔 놓았어. 이제 아빠는 더 이상 가족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려고 해. 우리가 함께 웃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여행을 떠나는 그 모든 순간이 기적임을, 아빠는 매일 새롭게 배우고 있어.
딸아, 네가 우리에게 준 이 소중한 선물, 아빠는 평생 간직할 거야.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우리가 서로에게 더 많은 사랑을 표현하는 가족이 되길 바란다. 네가 아빠와 엄마에게 준 사랑을, 아빠도 더 많이 돌려주고 싶구나.
사랑하는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