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 보내는 열 여섯 번째 답장
아빠!
'마음의 안전 거리'라는 말. 요즘 들어 더욱 깊이 공감하게 돼.
학생 때는 친구들에게 온 마음을 쏟아도 학교 안에서의 생활이었기에 서운함을 느껴도 금방 풀고,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지냈던 것 같아. 때로는 내가 친구에게 100의 마음을 쏟았는데 80만큼만 돌아오면 서운했던 적도 있었지.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 후,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관계가 정말 어렵다는 걸 절실히 깨닫게 됐어.
나는 내가 다가가고 열심히 하면, 그만큼 인정받고 사랑받을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 특히, 처음 그런 감정을 느꼈던 순간이 생생히 떠올라. 첫 인턴 생활을 하던 때였어. 마침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고, 아빠가 명절마다 주변 분들께 작은 선물을 준비하던 모습이 생각났어. 나도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작은 자취방에서 레몬을 닦고, 썰고, 설탕에 재워 레몬청을 만들었어. 유리병을 하나하나 소독하고, 선배들 이름까지 스티커로 정성껏 붙여가며 준비했지. 영상 인턴은 나 혼자였고, 업무도 많았지만 밤늦게까지 시간을 쪼개 가며 만들었던 것 같아. 그렇게 정성껏 10병 가까이 준비한 레몬청을 종이 가방에 담고, 1시간 20분을 걸려 회사에 도착했어. 선배들에게 추석 잘 보내시라고 인사하며 하나씩 건넸을 때, 대부분은 고맙다고 웃으며 받아주셨어. 그런데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하더라.
이런 거 하는 것보다 일을 잘하는 게 더 중요해
지금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해. 바쁜 와중에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겠지. 하지만 당시에는 그 말이 너무 서운했어. ‘그냥 고맙다고 한마디 해주면 안 되는 걸까?’ 싶었지.
그 후 사회생활을 10년 가까이 하면서, 회사에서는 감정보다 일이 우선된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어. 그래서 그때부터는 마음의 안전 거리를 지키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던 것 같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계가 쉽지만은 않았어. 정말 좋아해서 잘해주던 동료가 갑자기 이유 없이 냉랭해져 멀어진 적도 있었고, 오랫동안 친했던 친구들이 곁을 떠나기도 했지. 회사에서 누구보다 친했던 동료 PD님들과도 퇴사 후에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긴 경우도 많았고. 머릿속을 스쳐 가는 서운한 순간들이 참 많아. 그래도 이제는 그런 일들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려 해.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계를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는 걸 배웠으니까.
아빠, '헤맨 만큼 내 땅'이라는 말 알지?
길을 잃고 헤매본 만큼, 결국은 더 단단한 땅을 밟게 된다는 뜻이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그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며 어려웠던 만큼, 앞으로는 더 좋은 관계를 쌓아갈 수 있을 거야. 이제는 내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영원히 함께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아.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적당한 거리에서 내 마음을 표현하고, 준 만큼 돌려받겠다는 욕심을 내려놓으려 해. 그러면 정말 좋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오래 머물러 주지 않을까?
아빠가 써준 ‘마음의 안전 거리’에 대한 편지를 읽고 나니, 다시 한번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늘도 따뜻한 편지 고마워, 아빠!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