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흔드는 일이 이렇게 아릴 줄이야

하루치의 따뜻함 11

by 전태영
<하루치의 따뜻함, 열 한 번째 이야기로 이어갑니다>

퇴직을 앞두고 시작한 이 작은 기록이 오늘은 한 장의 손짓을 이야기합니다. 말보다 느리게, 그러나 더 깊게 다가오는 인사. 그 손길 안에서 우리는 고마움과 사랑, 그리고 기다림을 배웁니다. 잠시 머물고 싶은 날, 이 글이 당신의 하루에도 따뜻한 쉼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세상 벽에 부딪혀 내가 길을 잃을 땐 우리 집 앞에 마음을 매달고,
힘을 내서 오라고 집 잘 찾아오라고 밤새도록 기다리던 아버지 내가 시집가던 날,
눈시울을 붉히며 잘 살아라 하시던 아버지, 사랑합니다. 우리 아버지


‘아버지와 딸’이라는 노래다.

딸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조용히, 그러나 절절하게 전해지는 이 노래를 들으면

나는 자연스럽게 장인어른을 떠올리게 된다.

장인어른은 평생을 담배포 구멍가게로 생계를 이어오셨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살아오신 분이다. 이제는 연로하셔서, 고향집을 정리하고 읍내의 오래된 아파트 1층으로 이사하셨다. 엘리베이터 하나 없는 아파트였지만, 오르내리기 쉬운 1층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요즘 나는 자주 찾아뵙지 못한다. 거리가 먼 것도 아닌데, 자꾸만 마음이 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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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내는 자주 들른다. 어쩌다 나도 함께 가게 되면, 장인어른은 여전히 문 앞까지 걸어 나오셔서 반갑게 웃으며 맞아주신다. 손을 꼭 잡아주시고, 등을 토닥이며 자리에 앉으라고 하신다. 그 손길은 조심스럽고도 따뜻하다. 연세가 많으셔서 대화도 쉽지 않다. 하지만 그저 눈빛만으로도, 마음으로 한마디를 더 전하려 하신다. 정신이 맑으신 덕분에, 사위인 나의 근황을 너무도 자세히 알고 계시다. 그 마음 깊은 곳에 담긴 사위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다. 많지 않은 이야기,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잠시 들러 함께하는 그 순간들은 언제나 사랑이 흐르는 시간이다. 짧은 안부를 나누고 돌아설 때면, 어쩐지 마음 한켠이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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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아련한 순간은 차에 올라 돌아서며 베란다를 올려다보는 그 짧은 찰나에 있다. 언제나,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장인어른은 베란다에 나와 계신다. 창문넘어 힘없는 팔을 올려 떠날 때부터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고맙다. 고맙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조심해서 가거라. 자주 오너라.”

하는 아버님의 모습이 비내리는 오늘 따라 더 아련해진다. 살아계실 때 더 잘 해 드려야지.


딸은 말한다. 울 아버지 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

“고맙다. 천천히 차조심하고 조심해서 다녀라.


그 손은 쉬지 않고 나를 향해 흔들린다. 어느 날은 괜히 창문을 내리고 나도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마음이 울컥했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주름진 그 손은 “잘 가”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조심히 다녀와, 그리고 꼭 다시 와 줘”라고 말 없는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장인어른의 그 손은 말이 아니어도 충분히 따뜻했고, 그 안에는 사랑이, 응원이, 그리고 기다림이 담겨 있었다. 그 손짓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손을 흔드는 일이 이렇게도 마음을 아리게 할 수 있다는 걸.”


그건 단순한 작별이 아니라, 사랑의 마지막 조각 같은 것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나는 그 모습을 더 오래, 더 뚜렷하게 기억하려 애쓰게 되었다. 아직은 거기 계시리라는 믿음과 함께, 내가 먼저 손을 흔들기도 전에 늘 그 자리에 먼저 서 계시던 장인어른의 모습을 마음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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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안다.

그 천천한 손짓 하나가 말보다 깊은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때때로 말로 다 하지 못한 사랑을,

한 번의 손짓에 담아 건넨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아버님의 그 손을 떠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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