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고해(苦海)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아직도 가야 할 길'(The road less traveled)을 읽은 뒤 스캇 펙의 책을 더 읽고 싶어서 이것저것 뒤적이다 이 책을 만났어요.
거짓의 사람들 People of the Lie
스캇 펙 Morgan Scott Peck
미국에서 1983년에 나온 책이니 40년 전의 탁월한 정신과 의사와 대화를 한 셈이네요. 한국어로는 2003년에 번역됐고 이 책은 2021년 7월 개정 45쇄입니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다소 사변적이라면, 이 책은 자신이 상담한 인물들과 베트남전쟁에서 벌어진 미라이(MiLai)학살 사건을 예로 들며 악evil이란 무엇이고 그 치료(!)는 어떻게 가능한지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가야할 길 보다 훨씬 잘 읽히고, 논지가 훨씬 분명하다.
고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 인생이라는 고해에서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아직도 가야할 길'은 심리학과 영성을 접목했다면, '거짓의 사람들'은 종교적 색채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면서도 논지를 사회와 정치로 확대했다.
내용 요악
형이 자살할 때 쓴 권총을 동생에게 생일선물로 주는 부모. 그러고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겉으로는 우아하고 교양 있는 상류층 부모이지만 자녀의 성장에는 무관심하며 자신들이 어떻게 보일지만 신경쓰는 이들도 있다. 스캇 펙은 이런 사례를 만나면서 나르시시즘과 정신적 게으름(타자를 향한 무관심)이 우리 사회에 죄를 불러오는 악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타인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과학'이 되어가는 현대 의학과 심리학은 그러나 악을 진지하게 탐구하지 않는다. 스캇 펙은 악이 실체가 있는 질병이며 그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기만 하면 치료 가능하리라는 가정을 가지고 끈질기게 악의 개념을 파고든다.
그는 축사(인간 몸에 들어온 귀신을 쫓아냄)의 사례까지 공개한다. 이는 귀신 혹은 사탄이라는 실체가 있다는 걸 강조하면서 또한 정신의학적인 치료나 상담만으로는 퇴치가 불가능하지만 여기에도 (정신치료와 마찬가지로) 축사자의 이타적 헌신과 애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스캇 펙은 미라이 학살 같은 사건이 벌어지고 은폐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집단적인 나르시시즘과 게으름이 체계적으로 작용하는 현대 사회의 악함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심지어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이 벌어진 것도 애초에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만 군대에 가던 용병제가 모든 시민이 참전해야하는 징병제로 바뀌고 중산층 시민들까지 전쟁 비용을 부담하는 상황이 되어서야 가능했다고 일침한다. 즉, 인간은 타인에대한 무관심을 의도적으로 선택해 악을 방치하고 조장한다는 거다.
결론에서 스캇 펙은 악과 싸우는 일조차 악에 물들기 쉬우므로 '사랑의 마음'으로 악과 싸워야악을 치유할 수 있으며, 이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더라도 악에 물든 이를 품고 치유하고자 하는 진정한 사랑으로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만약 우리가 악에 대하여 파괴라는 작전을 펴 나간다면 우리는 자신까지도, 신체적으로가 아니라면 영적으로도, 파괴하는 것으로 끝을 내고 말 것이다. ... 악의 치유, 그것이 과학적이든 아니든 모두가 오직 개인의 사랑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감상
스캇 펙이 말하는 '악한 나르시시즘'은 요즘 말하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와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이코패스가 1920년대, 소시오패스가 1930년대에 등장한 용어이니 스캇 펙 역시 알고 있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뭘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책을 쓰던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는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같은 용어들이 널리 쓰이지 않았을 수 있다. 그래서 스캇 펙도 거기에 익숙하지 않았고, 그 자신이 독립적으로 탐구해 나르시시즘의 파괴성이란 개념으로 정리했고 이를 악의 이유로 설명했다면... 이제는 그 개념이 소시오패스로 대체할 수 있고 그래서 악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어떤 개인들의 유전적 혹은 뇌과학적 특성으로 말할 수 있을까? (소시오패스라는 말은 지금도 심리학 용어는 아니며, 사이코패스의 사회적 괴리 문제를 지적할 때 쓰는 대중적 용어라고 한다.)
물론 모든 사이코패스가 타인을 조종하고 파괴하는 소시오패스 성향을 드러내는 건 아니다. 과도한 자기중심성이 자신의 거짓을 숨기기 위해 타인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며, 스캇 펙 역시 나르시시즘 자체가 악이라고 하지 않고 나르시시즘에 취해 스스로를 비난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남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책임전가 행위가 지속적이고 의도적으로 계속되는 사례를 악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아니면, 스캇 펙이 악evil이라는 개념에 몰두하고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도 악한 사람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 사회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사악한 사건이 잇따라 어떤 사회적 현상으로 느껴졌을 수 있다. 나도 1994년의 박한상 사건을 신문기사로 접했을 때 그 뒤에 악의 실체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는 잔인한 존속살해 사건의 경우를 보고, 한국에선 성장환경이나 유전적 질환, 성격 (혹은 게임이나 영상물의 영향) 같은 개인적인 이유를 찾고 개인의 책임을 추궁하는 쪽으로 반응하지만, 스캇 펙 박사가 자신의 사유를 심화시켰던 1970년대의 미국은 사회적 이유와 함께 종교적 혹은 영적인 이유를 찾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생각
지금은 전자와 뇌과학의 시대인 21세기다. 개인과 사회와 정치 문제에서 영적인 통찰을 찾아내고 과학과 철학과 종교의 접점을 만드는데 몰두한 스캇 펙식 사유는 구시대적인 유물이나 시효가 다 지난 낡은 관점이라고 해야할까?
나의 강한 종교적 성향이 아니라도, 이 책은 여전히 읽을 가치가 있다. 나르시시즘과 지적 게으름, 특히 마라이 학살의 사회심리학적 분석은 오히려 이 시대에 더 필요한 지적일 수 있다.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과 더 편리하게 접속할 수 있게 해주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역설적으로 인간을 더 고립시키고 분열시키는 현상을 우리는 전세계에서 목격하고 있다. 왜 우리는 수많은 의견과 관점과 태도와 취향 중에서 우리의 맘에 드는 것만 골라서 접하고 거기에 빠지고 그 밖을 사유하지 못하게 되고 나의 영역 외부에 있는 이들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걸 서슴지 않게 된 것일까.
기술적인 문제, 이를테면 알고리듬이라든지 미디어 (il)리터러시라든지 클릭에 따라 수익이 좌우되는 구조적 이유를 우리는 주로 지적하고 있는데, 나르시시즘과 거짓이 인간을 파괴적으로 유혹하는 악의 본질이라는 스캇 펫의 통찰에서 진정한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용구는 가톨릭 수도자 토머스 머튼의 'Raid on the Unspeakable'에서 가져온 대목이었다.
악에 너무 끈질기고 강렬하게 집착하게되면 언제나 비참해진다.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 속에 있는 악마에 대항해서 싸우는 사람은 세상을 개혁하는 일에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