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인주 아버지의 붓글씨
아련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어쩌면, 그것은 기억이라기 보단 감각일 것이다.
포근함, 푹신함, 따뜻함. 안정된 느낌.
아버지는 한평생 붓글씨를 쓰셨고, 그 옆을 엉금엉금 기어 다니던 나는 아버지의 작업을 무척이나 방해했다고 한다.
어떤 날은 벼루 속에 손을 담그고 먹물이 잔뜩 묻은 그 손으로 화선지에 손도장을 찍고 다녔다고,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날 품에 꼭 안고 불편한 자세로 붓글씨를 쓰셨다고.
엄마가 좀 안아주지 그랬어?
너 그럴 때 엄마가 안으면 죽어라 울었어. 아빠만 찾았지. 묵향이 좋았을까? 아빠 품이 그리 좋았을까?
엄마는 잠이 들기 전에는 항상 일어나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는 잠자리에 드셨다.
엄마, 문을 왜 꼭 안 닫아?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사람 숨쉬는 것처럼 집도 숨을 쉬는 거 같아서 막지를 못하겠어.
엄마 손을 잡고 아버지 전시회를 따라 간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아버지의 작품마다 찍혀있던 붉은색 인주의 낙관이 지금도 눈에 선명하다. 그날 환한 웃음으로, 때론 과장된 몸짓으로 손님을 반기는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작품이 모두 다 팔렸다고 했다. 전시회는 엄청난 성공을 이루어 냈고 손님들의 박수소리와 환호성 속에서 나를 번쩍 안아 높이 걸린 작품까지 들어 올렸을 때 붉은색 인주의 낙관은 태양을 본 것처럼 눈에 들어와 박혔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치매에 걸리셨고 하얀화선지처럼 기억을 잃어갔다. 당뇨합병증으로 안구까지 적출해야만 했다.
엄마가 잠들기 전 열어둔 창문 틈으로 아버지의 호흡이 빠져 나가 다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란 걸 난 알 수 있었다.
뭐가 보이니?
아버지는 항상 같은 말만 반복했다. 치매로 인해 어느 특정 부분의 기억만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뭐가 보이니?
생의 저녁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의 호흡은 곧 끊어질 것처럼 거칠어 졌다.
벌레인가? 제발 말해다오. 뭐가 보이니?
아부지. 아부지 글씨요.
묵향은 안나세요?
제 눈에는 아버지가 한평생 쓰신 글씨만 보여요.
고생하셨어요.
정말 고생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