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의 연구
스토리란, 주인공의 삶의 균형이 예기치 못했던 특정 사건으로 인해 무너지고 그 무너진 삶의 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노력하는 과정에서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저도 책을 통해 접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딜레마란 그 어느 쪽을 선택해도 손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고요.
스토리의 엔진이죠.
엄마 아빠가 물에 빠져 죽을 위기인데 넌 구명조끼가 하나뿐이야. 누구에게 던져 줄 거야?
굉장히 잔인한 상황입니다.
고통만 강요하는 이런 식의 딜레마는 관객들이 거부하죠. 솔직히 말해 지켜보는 거 자체가 답답하고 짜증 나는 상황입니다.
내가 비싼 돈 내고 저런 모습 보려고 귀한 시간 내서 극장을 찾아왔을까.
그래서 매혹적인 딜레마가 필요합니다. 매혹적인 딜레마는 고통 속에서도 내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삶의 의미 그리고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해 주니까요.
매혹적인 딜레마는 반드시 배경을 필요로 합니다.
배경에 독특한 사건이 합쳐져야 매력적인 딜레마가 탄생하죠.
도심이라는 배경에서 달리는 폭탄버스라는 사건은 버스가 서도 터지고 계속 달리는 것도 위험합니다.
얼떨결에 운전대를 붙잡은 산드라 블록은 키아누 리브스와 함께 이 힘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잔인한 딜레마를 끝내 멋지게 해결합니다.
폭풍 속으로의 FBI요원 키아누 리브스는 서퍼 인생 단 한번 찾아올까 말까 한 거대 파도라는 배경에 목숨을 담보로 도전하는 범죄자 페트릭 스웨지를 상대로 체포와 도전의 기회 그리고 응원?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지죠.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다크나이트에서 조커는 배트맨에게 딜레마를 던집니다.
배트맨이 사랑하는 여자와 이 타락한 범죄도시를 구할 정의로운 검사를 양쪽에 붙잡아 두고 폭탄을 동시에 터트리는데, 배트맨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배트맨은 단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는 상황인 거죠.
여러분은 누굴 구할까요?
배트맨은 연인이 아닌 검사를 구합니다.(사실 이것도 조커의 계획과 사연이 있습니다만,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배트포드를 타고 도심을 질주해 도착한 곳은 연인이 있는 곳이 아니죠.
폭탄이 터지기 직전, 검사 하비덴츠가 소리칩니다.
왜 나에게 온 거야!
“Why did you come for me?!”
배트맨의 연인은 그 목소리를 통해 배트맨이 자신을 먼저 구하지 않고 대승 아닌 대승을 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조커가 준비한 시한폭탄이 터지고 죽음을 맞이하죠.
경찰에게 미친놈인 조커는 자경단인 배트맨 역시 마약, 살인, 폭행, 도박과 은행을 강탈하는 범죄자들에게 똑같이 미친놈이라는 논리를 앞세우고 그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넌 나를 완벽하게 해.
조커가 던진 딜레마는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가 갑니다.
고담시라는 범죄도시를 배경으로 철학적인 질문을 내던지죠.
조커가 법보다는 주먹과 폭력으로 정의를 실행하는 자경단 배트맨을 통해 증명하려는 것은 누구나 다 상황에 빠지면 선인도 악인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성악설을 떠올리게 합니다.
과연 조커의 주장처럼 인간이란 존재는 누구나 다 똑같은 존재일까요?
악한 상황에 처해 악인이 된 것이지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면 악인도 선인으로 살아갈까요.
살아남은 정의로운 검사 하비덴츠가 얼굴 반쪽이 날아가 투페이스 하비라는 빌런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조커의 완벽한 승리입니다. 이 승리는 배트맨의 윤리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을 넘어 이야기를 따라온 관객들의 윤리기준까지도 무너뜨립니다.
이 장면이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배트맨 3부작 중 2부에 해당하는 다크나이트를 명작의 반열에 올린 장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매혹적인 딜레마는 스토리의 엔진이지만, 이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작가에게는 커다란 숙제입니다. 아무리 고민해도 해결되지 않고 24시간 어깨를 짓누르는 과업이죠.
이때 작가는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면 안 됩니다.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타인에게 기대고 의지하는 순간, 그 작가는 이미 작가의 생이 끝났다고 봐야 합니다.
처음부터 같이 시작했으면 모를까, 너무 힘들다고 의지하면 이야기는 정면돌파를 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됩니다.
관객들은 귀신처럼 알죠.
이 세상은 아직 아름답고 나쁜 인간들보다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 더 많기에, 좋은 이야기도 포기하지 않고 고민하면 그 딜레마는 매혹적인 만큼 유혹적으로 풀리게 될 것이라고 전 믿습니다.
제가 죽기 전에는 꼭요.
이야기를 만드시는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
힘내세요.
사진 네이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