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리다
난 술과 담배 그리고 최소한의 생활유지를 위한 소비 말고는 소비 자체를 그리 즐기지 않는, 매우 생산적인 사람이다. 여기에는 외식도 포함되어 있다. 외식을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직접 요리하는 걸 좋아해 냉장고를 파고 썩 괜찮은 요리를 만들어 내면 뿌듯하다.
아내가 맛있게 먹어주고 칭찬해 주면 그게 10원짜리 비행기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린아이처럼 기분이 좋아져 설거지도 잘한다.
난 요리를 할 때 치우면서 하는 스타일이기에 주방은 항상 깨끗하고 청결하다. 아마 생긴 것과는 전혀 다른 깔끔한 성격이 주방에도 작용? 적용 되는 것이리라.
1억 연봉 클럽에 가입된 지가 꽤 오래되었는데 한 달 용돈은 60이다. 여기에서도 30만 원을 따로 적금 넣고 있다. 그러니까 한 달에 술 담배만으로 30만 원 쓰고 사는 거다. 사회생활하는 남자가 아닌 것이다.
이게 가능한 건 회사, 집, 글, 혼술, 잠.
이 사이클을 정확히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사는 모습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꿈꾸어 왔던 그 모습 그대로이다.
난 어렸을 때 뛰면 머리가 아파서 뛰질 못했다. 조금만 빨리 걸어도 뇌가 흔들리는 것처럼 어지러웠는데 그럴 때면 해골을 떠올리곤 했다. 해골과 뇌가 따로 노는 느낌? 아무튼 또래 아이들 논두렁에서 공 차고 야구하며 뛰어놀 때 난 구경만 했고 친구들을 위해 불을 피웠다.
친구들에게 난 항상 아프고 약한 아이였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래서 혼자 사색하고 생각을 많이 했는데 그때부터 먼 미래의 내 모습과 행복한 가정을 꿈꾸었던 것 같다.
더 구체적으로 그린 꿈은 30평 대 아파트와 고급세단을 모는 내 모습에 아내는 예쁘고 상냥하고 자식은 아들이며 서울대를 다니는 것이었다.
이 오래전 꿈과 지금 현실이 다른 게 있다면 30평대 아파트가 두채이고 아내는 예쁘지만 상냥하지 않고 늘 화가 나 있고, 아들은 서울대가 아닌 고려대를 다니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꿈에도, 계획조차도 없었던 장르작가가 되어 있다.
그래도 거의 비슷한 걸 보면 사람 인생은 그린 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맞는 거 같다.
내가 이루어 냈다면 이루어 낸 것이고,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난 어린 시절에 꾸었던 꿈과 목표를 다 이루어 냈고 보너스까지 받은 셈이다.
하지만 문제가 여기에서부터 생겨났다.
내가 언제부턴가 미래를 그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만 나면 과거를 회상하고 추억 속에 잠긴다.
막 슬프고 눈물이 난다.
쓰는 글도 죄다 이별이야기다.
오랜 세월 함께 일했던 지인작가에게 글 하나 보여주었다가 엄청 혼났다.
글이 이상해지고 있다나.
형, 당분간 글을 쓰지 말아 봐요.
잠시 내려두려고 했는데 또 중독처럼 글을 쓰고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앞으로 10년 뒤 그림을 그려볼까 한다.
난 정년 퇴직했고 손녀를 안고 있다. 제법 잘 나가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다. 모아둔 돈도 많고 드라마 대본 각색이 꾸준히 들어와 일을 즐긴다. 여유 있다.
차는 제네시스에서 포르쉐로 바꾸었다.
내가 각본과 각색까지 참여한 영화는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난 지금 손녀와 함께 내가 만든 이야기와 엔딩 크레디트의 내 이름을 보려고 스크린 좌측 H1 좌석에 앉아 있다.
내가 평소 좋아하는 자리다.
아들과 며느리는 바쁘다. 대기업 컨설턴트라 얼굴 보기도 힘들다. 둘이 돈을 엄청 번다고 한다. 쓸어 모은다나.
잠깐만, 우리 집사람은 뭘 하고 있을까?
동네 아줌마들이랑 스타벅에서 수다 떨고 있겠지.
이렇게 훌륭한 남편에게 여전히 늘 화가 난 상태로 흉도 보면서 은근히 자랑질도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