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시작
도심의 새벽, 아파트단지를 산책하며 걷는 그녀의 기억은 유년의 기억에 머물러 있다.
그녀의 고향은 먼 북쪽이다.
그녀가 사는 곳, 1200세대 아파트단지는 말이 좋아 호수라고 불리는 작은 저수지를 배경으로 남쪽에 위치해 있다. 그 호수, 저수지가 품고 있는 물은 그녀가 담고 있는 기억처럼 탁하다. 뿌연 물속에서 나무가 자란다. 녹조 가득한 수풀과 썩지 않는 뿌리는 그녀의 남편의 끈질긴 집착과도 같다. 그녀는 출렁이는 저수지의 물결에서 정체되지 않는 시간의 흐름을 발견한다. 시간의 흐름은 물의 흐름이고, 물의 흐름으로 시간을 측정한다. 먼 북쪽의 기억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그녀가 서 있는 이곳, 남쪽으로 흘러 들어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15년이다.
그리고 그 15년이라는 시간은 정체와 흐름 속에서 꾸준히 이어져온 폭력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녀는 남편이 선물한 원형수정구슬을 손에 들고 있다.
힘껏 내던지고 싶다.
하지만 기껏 내던졌는데 다시 돌아와 언제 버렸냐는 듯 침대 머리맡에 다시 자리를 잡고 있을 것만 같아 두렵다.
수정구슬은 꽤 묵직하다. 그 안에는 파랑새가 산다.
아냐, 갇힌 거지.
그녀가 들뜬 마음으로 선물상자를 열고 수정구슬을 꺼내 들었을 때 작품의 제목을 보며 한 말이다.
<파랑새가 사는 수정구슬>
갇혀 살아도 사는 건 사는 거야. 파랑새의 의미는 행복이잖아. 어디 멀리 있지 않고 항상 곁에 있는.
불쌍해 보여. 이렇게 보면 나비 같아.
그녀가 수정구슬의 각도를 돌려가며 밑에서 위로, 옆에서 아래로 파랑새를 확인한다.
생일 축하해.
응. 고마워.
그녀는 남편이 직접 만들어준 선물을 그리 썩 좋아하지 않았다. 파랑새가 사는 수정구슬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정구슬은 노력과 시간이 담긴 작품을 떠나 남편이 그녀를 때리는 무기이자 흉기였다.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며.
그녀는 아파트 단지에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한다.
요 며칠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예쁜 아이가 등록을 마쳤다.
아이의 엄마는 일부러 평범한 척한다. 남들 다 보내니까 또 아이가 다니고 싶다니까 그냥 찾아왔다고 말한다.
피아노 쳐봤어?
네.
엄마랑?
네. 엄마도 선생님처럼 선생님이었어요. 엄마 피아노 엄청 잘 쳐요.
그렇구나. 그러면 엄마한테 계속 배워도 될 텐데?
엄마가요. 더 가르칠 게 없대요.
아이의 눈은 너무나도 맑았다. 목소리는 성대에 뭘 한 번도 넣어본 적이 없으니 가능한 진공 파이프처럼 공명과 울림이 있었다.
너 귀여운 거 알아?
네?
아이의 볼이 빨개진다. 엄마를 쳐다보는 눈이 너무나도 예쁘다.
그녀는 많은 아이들을 만나보아서, 지금 눈앞의 이 아이가 천재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녀가 천재를 알아보는 첫 번째 기준은 아이 얼굴의 그늘이다.
그늘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아이였다.
두번째는 어휘다.
아이는 또래 아이들이 사용하지 못하는 고급 어휘를 구사했다. 기적처럼 찾아온 아이는 그녀의 기대를 훌쩍 넘어섰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개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져가는 신비한 아이였다.
그녀는 아이의 연주를 듣는 시간이 너무나도 행복했고 꿈처럼 아늑했다.
아이는 그녀에게 큰 선물이었다.
너 말투가 남쪽 같아. 엄마 고향이 어디야?
엄마 고향은 서울인데요. 아빠가 지금도 사투리를 많이 써요. 근데 선생님 제 말투 이상해요?
아냐. 이상해서 그런 거 아냐.
아이가 활짝 웃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선생님 억양에는 사투리가 있어요.
억양?
네. 억양이요.
그래?
표준어를 사용하시기는 하는데 억양이 좀 달라요.
아 그러니?
그녀가 웃는다. 얼마 만에 이렇게 웃나 싶다.
남편의 집착과 의심 그리고 폭력이 극에 달한 어느 날이었다. 그녀가 수정구슬을 가방에서 꺼내 피아노 위에 올려 장식한다.
아이가 그 피아노 앞에 앉아 소나타를 연주한다.
그녀는 아이가 연주하는 소나타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형광등을 투영해 빛을 발하고 있는 수정구슬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당장 칭찬을 해야 하는데 감정이 격해져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응.
왜… 그러세요?
뭘?
아뇨… 우시는 거 같아서요.
그녀가 들키지 않으려고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이미 들켰다는 걸 안다.
우는 거 아니야.
네….
아이는 그녀를 똑바로 보고 있다. 그녀가 헛기침을 한다.
우는 거 아니고 선생님 지금 너한테 의지하고 있는 거야.
네?
아이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 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지라는 말을 충분히 이해하는 똑똑한 아이다.
그래서 지금 더 혼란스러울 것이다.
자신이 지금 왜 선생님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물어보고도 남을 아이다.
하지만 활짝 웃는 아이.
아이가 아무 말없이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