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숏츠

거짓말

왜 늘 화가 나 있는 걸까?

by 임경주



군대 제대하고 복학한 나는 스물여섯 밖에 안 먹었는데 지금 와이프에게 아저씨 소리를 들었다.

하긴 그때 복학생들은 새내기들에게 다 아저씨였다.


공부를 참 안 하는 학생들로 가득 찬 학교인데, -어쩌면 나만 안 했을 지도- 축제 때만 되면 여기저기 온통 싸움에 경찰차 뜨기로 유명한 학교다.


그래도 시험기간에는 도서관이 꽉 찬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서 밖에서 맘껏 뛰놀지 못했던 나는 누나들이 일기장에 메모해 둔 글을 방바닥에 배 깔고 누워 똑같이 따라 쓰는 걸 좋아했고 누나들이 읽는 책들을 뒤따라 뒤적거렸다.

그때는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힘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날 위로해 주는, 내가 찾고 싶고 보고 싶은 문장만 찾아 헤맸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셋째 누나 일기장에서 발견했을 것이다. 누나 네 명은 밤에 보면 다 똑같이 생겼고 글씨 체도 다 비슷해서 그 일기장이 정확히 누구의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이겠지.

그때 발견한, 누나가 옮겨 놓은 -김남조 시인의 에세이 중에서-라는 누나의 글씨체와 함께 얼굴 모르는 시인의 글귀를 지금도 기억한다.


또 하나의 은밀한 손 있어 그 난처하고 수치스러운 걸 덮어 주었으니 하면 나란 무엇인가.

세월은 어디에서나 흐르고 만날 수 있다 하였는데 어찌합니까.

나는 붙잡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거늘….


아마 기억이 왜곡되고 더 찾아보지 않아 내가 기억하는 저 문장이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을 텐데 중요한 건 첫사랑처럼 찾아온 문장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국어와 서예가였던 아버지의 영향 탓인지 한문 성적이 우수했던 내가 이과를 선택하고 건축을 전공했다는 건 참 아이러니하다.

지금 집사람을 만나려고 그랬을까.


다시 공부 참 안 했던 학창 시절로 돌아가보면 이해하지도 못하는 보르헤스 전집을 옆구리에 끼고 지적허영심에 가득 차 시험기간 때 도서관 빈자리를 찾아 헤매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는 또 우연히 알게 된 부산아가씨에게 폭 빠져 지독한 짝사랑의 열병을 앓던 시기였는데 어떻게 그 늦은 시간에 찾아간 도서관에 그 한자리가 나를 위해 딱 비어 있었는지 참 신기하다. 난 분명 조용히 앉았는데 오른쪽 옆자리의 여학생이 나를 보았다.

공부 흐름을 깼나?

그래서 자리 있어요? 하고 물었다.

아니요.

네.


그게 다였다.

한데, 그 빈자리에 앉는 순간 내가 또 다른 사랑에 빠질 줄은 꿈에도 몰랐고 그 사랑이 지금 30년 가까이 내 곁을 지켜주고 있는 호랑이 아내가 될 줄도 난 그때 정말 꿈에도 몰랐다.


아내는 지금도 말한다.

누가 옆에 앉으니까 힐끗 보았는데 좀 아니 많이 못쨍겼단다.

아이고 어쩌나. 재빨리 못 본체 했다나?

자기는 오른쪽 옆모습보다 왼쪽 옆모습이 항상 자신 있어서 이 못쨍긴 아저씨도 자기 왼쪽을 예쁘게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단다.

그게 전부란다. 나에게 1도 관심이 없었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뭐 그러면 나는 관심있었나? 난 그때 진짜 이해 못 하는 보르헤스와 부산아가씨 밖에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난 진짜 지금도 솔직하건대 그 여학생 따라 일어난 거 아니다.

배고파서 밥을 먹어야 했기에 글적거리던 글을 멈추고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그때 800원이었나. 밥을 곱빼기로 퍼주는 학교 앞 식당에 들어갔는데 또 만났다.


자리가 꽉 찼다. 딴 식당 찾아가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막 던졌다.


어? 혼자 먹어요?


그때 집사람은 잠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못쨍긴 게 지금 나한테 감히 작업 거나? 뭐 그런 생각도 했을 것이다.

지금도 물어보면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렇게 마주 보고 같이 밥을 먹다가 할 소리 못할 소리 다한 거 같다.


아저씨.

지금 계속 얘기하시는 그 부산아가씨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가씨 제가 보기에 절대로 아저씨 남자로 안 봐요.


왜? 내가 못 생겨서?


뭐 그것도 그렇고 여자는 그래요. 한 번 남자로 안 보이는 사람은 그냥 계속 남자로 안 보여요.


그래도 혹시 날 조금이라도 좋아하진 않을까? 요만큼이라도. 이번 주에 부산 갈까 하는데.


가지 마세요.


가지 마?


네. 가지 마세요. 제가 지금 딱 보니까 아저씨 가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아저씨만 힘들어져요. 아저씨 사람 쉽게 좋아하죠?


어.


거봐. 아저씨가 문제네.


아니 사람이 좋은 걸 어떡하라고.


근다고 아무나 막 다 좋아해요?


아무 나는 아닌데?


뭐 딱 보니까 아무나 다 좋아하는 거 같구먼 아니라고 그래.


아 그래 나 아무나 다 좋아하는데 그쪽은 안 좋아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헐.


그때 알았다. 그 아이가 몸을 살짝 비틀어 자기 자신 있는 왼쪽 옆모습을 보여주려는 걸.


지금도 이 이야기를 하면 절대로 아니라고 한다.

찐으로 화를 낸다.

못 생긴 아저씨 불쌍해서 몇 번 더 만나준 게 천추의 한이 란다. 지금도 자기 손으로 발등을 찍고 있다나 어쩐다나.


자기는 거짓말 못하는 사람이라는데 내가 보기엔 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니까 지금도 내 옆에 있겠지.


나 솔직히 언제부터 좋아했어?


지금도 아내는 한결같이 말한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다고.

불쌍해서 살아주는 거란다.


아마 이 이야기도 브런치에 올린 거 알면 엄청 화낼 거다.


나에게만 늘 화가 나 있는 사람이니까.


근데, 도대체 왜 늘 화가 나 있는 걸까?

진짠가?

내가 불쌍해서 살아주고 있다는 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