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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숏츠

황홀한 사춘기

그때 그 시장통 아이들

by 임경주



난 어렸을 때 읍내에 나가면 시장골목으로 직진해 들어가지 못하고 일부러 멀리 돌아갔다. 왜냐하면 그 시장통에 사는 아이들이 엄청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 녀석들.

와 지금 생각해도 잡초처럼 억세고 짖꿎긴 얼마나 짖꿎었나.

중학교 2학년 때 그중 한 녀석이랑 짝꿍이 되었는데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학교 가기가 싫을 정도였다.

그때는 다들 순수하고 악랄한 게 없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나름 처신을 잘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직접적인 괴롭힘은 기억나지 않지만 굉장히 피곤했던 기억은 선명하다.

난 항상 정돈되어 있는 걸 좋아하는데 그 녀석들 친구들이 모여 놀고 가면(난 일부러 도망치고)내 책상도 엉망진창이고 가방은 바닥에 떨어져 구르고 있고 누나가 아끼던 샤프는 깨져 있고 아무튼 그 녀석들 놀다 가면 내 나름대로의 피해는 막심했다.

그래서 말도 잘 안 했는데 어느 날 이 녀석이 자기 집에 가자는 거다.

부모님이 여행 가셔서 자고 놀 거라고.

내가 그때 거기를 왜 따라갔는지 모르겠지만 신세계를 경험했다.


담배, 술에 황홀한 사춘기라는 빨간 책까지.


여기가 정녕 어디 딴 나라가 아니고 내가 사는 동네가 맞는지 헷갈린 정도였다. 충격 그 자체였던 것이다.


밤이 깊어질 때 한 녀석이 각자 좋아하는 여자 아이 이름 말하자고 해서 알딸딸한 나는 제일 먼저 ㅇㅇ! 하고 소리쳤다.

근데 모여 논 아이들이 나 포함 4명이었는데 나머지 세 녀석들 얼굴 반응이 왜?라는 표정이었다.


너 진짜야?


다들 내가 그 여자애를 좋아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나 보다.


너 왜 좋아해? 아니 다른 애들도 많은데 왜 그 얘야? 하면서 자꾸 묻는데 너희들은 누구 좋아하는데 하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이 녀석들 기다렸다는 듯 한다는 말이, 다들 입을 맞춘 것처럼 한 여자애를 똑같이 지목하며 몸을 비꼬고 난리를 치는데 지금도 그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난 전혀 관심 없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더 예쁘고 착해도 더 착하고 얌전하고 공부도 더 잘하는 것부터 시작해 모든 게 다 백배 더 나은 것 같은데 이 잡초 같은 녀석들과는 태생부터가 나와는 괴리와 간극? 이 너무나도 크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고 난 스스로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복싱을 꾸준히 해왔다.


몇 년 전 동창회를 가게 되었다. 솔직히 가기 싫었지만 그때 녀석들에게 들켰던(물론 당당하게 말했지만) 그 여자동창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제발 그 시장통 녀석들은 모임에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참석했는데 우와.

이 시장통 녀석들 다 참석했고 엄청 순해졌다. 다들 시골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는데 새카만 얼굴에 어른의 순수함이라고나 할까?

그 거친 녀석들은 다 어디로 가고 친절과 배려로 날 반기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술도 적당히 들어갔고 기분이 참 좋아졌는데 시장통 한 녀석이 여자 동창들도 다 있는데 갑자기 하지 말아도 될 말을 기어코 꺼내는 것이다.

내가 ㅇㅇ좋아했다고. 그때 내 말에 관심도 안 가지던 녀석들이 맞아 맞아하며 손뼉 치며 놀리기 시작했다.


너 진짜 나 좋아했어?


건너편에 앉아 있던 동창이 그녀다.

일부러 모른 체했는데 다 들켜버렸다.


그랬나? 그게 언제지? 기억이 잘…


너 뭐야? 정치인이야?


그녀의 말 한마디에 다들 웃고 난리가 났다.


야. 지금이라도 말해. ㅇㅇ. 지금 혼자야.


미친놈.


어이없어 웃고 있는데, 깜짝 놀랐다.

술에 잔뜩 취한 ㅇㅇ이 내 옆에 앉더니 뒤통수 쓰담쓰담 어린애 취급하며 러브샷을 하자네.


내가 못할 거 있나.

그렇게 선은 이미 넘었고 자기가 몇달 더 빨리 태어 났다고 누나가 찌찌 만져줄까? 이러면서 내 몸을 막 뒤지는데 아무리 동창들 오랜만에 만났다지만 너무 거리낌 없는 모습에 좋기도 하면서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적당히 눈치 보고 빠져나오는데 그때 그 어린 시절의 충격의 빨간 책 황홀한 사춘기가 떠올라 혼자 담배 피우며 한참을 웃었다. 그러고 보니 담배도 그때 배운 거 아직도 못 끊고 있다.


시장통 녀석들 어떻게 알고 튀어나와 나를 붙잡고 들어가 그 여자 동창 옆에 기어코 다시 앉혔다.

또 난리가 나고. 내가 이 친구들 기억 속에 그리 쑥맥이었나 싶었다.

그러면 그렇지.

시장통 녀석들은 나이를 먹어도 역시나 바뀐 게 하나도 없었다.


겨우 빠져나와 새벽길을 걸어 시골집으로 향하는데 그 시장골목을 여전히 직진하지 못하고 멀리 돌아갔다. 그냥 그 길이 어른이 되었는데도 싫었다.

나 역시도 여전히 나약하고 무력한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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