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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내 안의 그녀

by 임경주


내 안에는 어떤 여자가 있다.

그녀는 나보다 용감하고 결단력이 뛰어나다. 무기력이 학습된 나와는 정반대로 진취적이다. 과감하고 똑똑하다.

그녀를 다시 발견한 건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준비하던 스물 다섯 그 해 가을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버지는 분명 내가 잘 되라고 공자 왈 맹자 왈 하셨을 텐데 그 때 당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주 어린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신 스스로 오늘의 배움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를 앞에 앉혀 두고 복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만 보였다.

아버지는 작품을 완성하고 흡족하면 호가 새겨진 도장으로 낙관을 박았다. 화선지 위에 빨간색 인주가 찍히면 손으로 부채질 마감을 했는데 훈육인지 잔소리인지 당신의 복습인지 아무튼 나의 고통이 시작되는 건 그때부터였다.


이 세상에 주인이 없는 물건은 없다. 너가 원하는 걸 가져올 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넌 도둑질을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죄는 도둑질이다. 단 하나의 죄밖에 없어. 다른 죄들은 도둑질의 변형이야. 사람을 죽이면 생명을, 거짓말을 하면 진실을, 남의 아내를 탐하면 그 남편에게서 아내를 훔치는 것이다.


난 뭘 훔치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말을 듣고 있는 걸까.

훗날 연을 쫒는 아이에서 아버지의 저 말씀과 꼭 닮은 주인공 아버지의 대사를 접했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울 아부지가 미래에서 이 책을 먼저 읽지 않았고서야 어떻게 그 때 어린 아들을 앞에 앉혀두고 이 대사와 거의 똑같은 말을 하실 수가 있었는지 참 신기했다.


어쨌든 나는 그저 네네 하면서 도대체 언제 끝나나 내 머릿속에는 영숙이랑 말자 밖에 없는데. 그랬던 것 같다.

아버지는 누나들과 남들에게는 상냥하고 친절했는데 유독 나한테는 엄하셨다.

다른 건 지금도 내가 못난 탓이오, 하고 넘어가지만 그 혀를 차는 소리와 못마땅한 눈빛으로 나른 보던 그 모습은 내가 친아들이 아닌가? 옆집 아저씨 아들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 때 아마 그 어린 나이에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내 안에 또 다른 자아를 스스로 만들지 않았을까.

누나들은 내가 받는 고초를 전혀 받지 않고 아버지랑 말도 잘하고 -나는 뭔 말을 하려면 겁부터 나고 더듬고 그러는데- 예쁨을 받고 있으니 나도 차라리 여자였으면 어땠을까. 뭐 이런 생각에서 출발해 지금의 그녀가 내 안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말도 안되는 합리화를 해보는 것이다.

하긴 막내누나가 화장도 해주었고 -이 못난 얼굴에 그래도 막둥이라고 예쁘다면서- 누나들 옷도 입어보고 했는데 아무래도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도무지 자신이 없다고 느끼고 그녀를 봉인해버린 것 같다.


다시 스물 다섯 그 해 가을로 돌아가보자.

뭐 내가 동성에 빠져 내 안의 그녀를 발견했을 것이라 추측하겠지만 전혀 아니다.

그 반대로 눈부시게 아름답고 예쁜 여자를 소개 받은 자리에서 내가 아닌 내 안의 그녀가 튀어나와 그 예쁜 아이와 서스름없이 대화를 하고 있는 걸 신기하게 제 삼자의 눈으로 지켜본 경험을 했다.

그날 난 스스로 봉인했던 내 안의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이다.


난 내가 당장 입어야 할 옷보다 죽을 때까지 입을 일도 없는 여자 옷에 관심이 많고 평소 요리를 즐긴다. 설거지도 잘 한다.

내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이 여자이고 강인하다.

남자는 여자주인공의 보조 또는 들러리 역할이다.

이건 어쩌면 이 세상 현실도 마찬가지로 보일 때가 많다. 당장 결혼식만 보아도 주인공은 신부다. 신랑은 그저 신부 옆에서 신부를 더욱 더 돋보이게 하는 들러리로 밖에는 안보인다. 내 시선이 잘못된 것일까?

난 아무리 보아도 그렇게 밖에는 안보인다. 어떤 결혼식장에서는 신부가 너무 예뻐 신랑이 들러리는커녕 아예 안보일 때도 있다.

이런 시선이 가능한 게 내 안의 그녀 덕일 것이다.


난 분명 나약하고 멍충하고 무력하지만 그녀는 나와 다르다.

하지만 그녀도 단점이 있다.

독특하게도 지문을 세상 싫어하는데 타인의 지문이 나에게 옮겨오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도대체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세균이나 바이러스 문제도 아니다. 단지 남의 지문을 극도로 싫어할 뿐이다. 그래서 난 내 전화기 라이터 볼펜 책 등등 아무리 친한 사람이어도 빌려줄 수가 없다. 누군가가 흡연장에서 불을 빌리면 내가 반드시 켜줘야 하고 만약에 라이터를 빌려가면 그냥 쓰세요. 하고 돌려받지 않는다. 그녀 때문이다.

절대로 깔끔 떠는 것이 아니다. 난 정말 생긴대로 놀고 싶다. 하지만 그녀가 허락하지 않는다. 지문이 그렇게도 싫다는데 난 아직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아니 얼추 알고 있으려나.


아무튼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내가 돌+아이는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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