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남자
지금이다. 상대가 움직였다.
박휘순 씨 미란다원칙. 피의자의 권리에 대해 들으셨나요?
아, 정말!
정해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영은 자신을 노려보는 정해인 형사의 시선을 외면한 채 박휘순의 다리를 보았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듯 달달 떨고 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진술을 거부하는 권리 즉 묵비권을 행사할 수…
그만해!
정해인이 박휘순의 머리카락을 통째로 움켜쥐고는 책상에 박아버린다. 그 한방에 정신을 잃고 의자와 함께 옆으로 무너진다.
정해인 형사!
가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뭐!
당신들은 지금 모두 다 불법을 저지르고 있어!
그래서 뭐? 당신은 도대체 누구 편이야? 왜 범죄자 편을 드는 건데? 수사관이면 수사관답게 굴어. 당신이 이 돼지새끼 변호사야? 사람을 죽인 새끼라고! 그것도 내 마누라와 내 딸을! 당신이…
정해인이 감정이 격해져 더 이상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은 꼭 해야겠다는 다짐이다.
당신이 그 고통을 알아? 그 지옥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게 어떤 건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정해인이 더 이상 내뱉지 못하고 스스로 화를 삭인다. 혼자 시팔거리며 담배를 찾아 물었다.
형사님. 그러니까 자백을 받아내려고 하는 거잖아요.
정해인이 가영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다. 성냥으로 불을 붙인다. 한번, 두 번. 세 번…
성냥이 부러지고 불이 켜지지 않으니 신경질적으로 성냥갑을 벽에 던져버린다.
이 새끼가 자백을 할 거 같아? 바랄 걸 바라세요.
할 수 있어요.
뭔 수로요?
방해나 하지 마요.
정해인이 가영의 앞으로 다가온다. 광기에 사로잡힌 눈, 상처받은 짐승이다. 사냥개가 그의 별명이다. 박휘순을 지금 이 자리에 잡아온 것도 사냥개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영은 여기까지 알지 못한다. 그저 지치고 상처받고 두려움과 분노가 복잡하게 교차한 채로 세상을 향해 울부짖는 한 마리 짐승으로만 보였다.
수사관님. 지금 수사관님은 저 새끼가 사람으로 보이죠? 그런 거죠?
그럼 사람 아닌가요?
사람 아니에요. 이빨을 감추고 수사관님 머리 위에 올라타서 살길만 찾고 있는 교활한 늑대입니다. 이용당하지 마세요.
가영이 순간 다리가 풀려 휘청거렸다. 초능력이다. 가만 보니 초능력을 엄한 곳에 쓰고 있었다. 방해요소를 제거할 수 없다면 내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병헌 과장이 돌아오기 전에 끝내야 할 일이었다.
아.
가영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곧 쓰러질 것만 같다.
정해인의 표정이 바뀌었다. 뭐지? 왜 갑자기 약한 척 하지?
놀랐나… 물 좀 주시겠어요?
뒤편 계단 아래를 지키고 있는 안기부직원 중 뚱뚱한 대머리가 벌떡 일어나 주전자를 들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저놈은 됐다. 한놈 해결되었다.
컵 따위 필요 없다. 가영이 주전자를 받아 입을 대고는 벌컥벌컥 마셨다. 이 시간은 길수록 효과적이다. 가슴도 활짝 펴고 앞으로 내민다. 고개를 과감하게 뒤로 젖히고 어디 볼 테면 보라. 나 역시 당신들과 다를 바 없다.
보이지는 않지만 정해인도 걸려들었다. 확신한다.
가영이 주전자를 다 비우고는 대머리에게 휙 던져주었다. 나이스 캐치.
정해인 형사님. 소주 한 잔 합시다. 거기 소주 줘봐요.
대머리 뚱보는 완전히 끝났다. 말을 아주 잘 듣네. 소주를 가져온다.
소주를 책상 모서리 끝, 아슬아슬한 선상에 내려놓고 잔을 들었다. 정해인이 술을 따라주지 않으면 실패다. 하지만 그럴 일 없다.
역시나 정해인이 술을 따른다. 가영이 단숨에 비우고 잔을 건넨다. 눈이 마주쳤다. 이제 나의 잔을 받아라. 어서.
정해인이 잔을 받았다. 끝났다. 마시기 전에 날려야 할 말이 있다.
형사님. 전 말이죠. 이런 생각을 해봐요.
?
형사님이랑 눈 오는 거리를 걷고 분위기 좋은 찻집에서 차도 마시고요.
내가 그쪽이랑 왜 거리를 걷고 차를 마십니까?
당연한 반응이다.
그렇다는 거예요. 지금 여기와는 다른,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안전하고 행복한 세상이요.
마신다. 표정만 보아도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는 악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영이 잔을 받았다. 한잔 받기 전 기절한 박휘순을 내려다보았다.
이 사람도 한 때는 어린아이였겠죠.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정해인이 술잔을 다시 가져가 자작한다. 연달아 두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바꿀 수 있습니다. 제가 평화로운 방법으로 자백을…
잠깐만요. 바꾸다니요?
뭔가 불길한 징조다. 하지만 가영은 밀고 나간다.
이 사람이요.
네?
순간 정해인이 가영을 삐딱한 눈으로 쳐다본다. 요리조리 살피기까지.
아, 젠장. 이 돼지새끼라고 했어야 했다. 가영이 자신의 실수를 눈치채고 인정한 그 때다. 그러면 그렇지.
아. 이제 보니 수사관님은 이 돼지새끼가 바뀔 수 있다고 보는구나.
네. 전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그니까 그건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죠.
박휘순 씨도 마음 어딘가에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아차! 싶었다.
역시나 가영이 정해인의 표정을 보는데 뒤에서부터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방금 들었어? 범죄자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대.
양심?
자기들끼리 막 웃기 시작한다.
들었어요? 지금 이 말 듣고 웃는 거죠?
정해인이 뒤돌아 물었다.
어. 그래. 들었어. 양심의 가책을 느낀대. 범죄자가.
기어코 안기부 직원 둘은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한다.
정해인도 어이가 없어서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아! 수사관님 너무 재밌으시다. 양심의 가책. 수사관님! 이런 놈들은요 양심 자체가 없어요. 아 눈물 나. 양심이 있으면 이러고 있겠어요?
가영이 두 눈을 감고 말았다.
정해인이 웃음을 딱 멈추고는 정색해서 말한다.
수사관님. 이놈들에게 반성이란 게 있다면 그저 어떤 처벌이 떨어질까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징벌의 시간 속에서 거짓으로 척하는 것뿐입니다. 이놈들이 뭘 반성하겠어요. 그 처벌의 시간이 너무 혹독하니까, 척! 그냥 반성한 척하는 거죠. 감형도 노리고요. 이놈들은 그게 반성입니다.
누가 모르냐, 이 새끼야. 가영이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형사님 제 말은 어떻게든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백을 이끌어 내볼 테니까 저를 한번 믿어달라는 겁니다. 아까 미란다원칙 들먹인 것도 다 작전…
네, 해보세요. 그 믿음이 박살 나는 모습 보고 싶네요.
정해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발로 박휘순의 머리를 툭툭 치며 깨운다.
박휘순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마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다.
다 나가주세요.
가영이 정해인을 노려보았다. 정해인이 양쪽 어깨를 으쓱하더니 안기부 직원과 함께 철문을 열고 나갔다.
문을 닫기 전,
이 일 끝나면 나도 죽을 결심이었는데요.
?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 일 잘 끝내고 밖에서 눈 오는 거리 좀 걷고 차 대신 소주 한잔 합시다. 무슨 일 있으면 소리쳐요. 여기 있을 테니까.
철문이 닫혔다.
심쿵. 가영은 심장이 쿵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예쁜 남자다. 날 믿어주고 있다. 어쩌면 저 남자야 말로 범죄자들이 제발 양심의 가책을 받고 변하길 더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