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딜레마, 정의란 무엇인가
노태우 정권 말, 1993년 초반은 군부중심의 권위주의 체제에서 벗어나 시민 중심의 민주주의로 전환되는 과도기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변화에 가장 둔감한 사람들은 기득권 그 언저리에 위치해 있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의 폭력수사와 강압수사는 그 끝을 향하고 있었다.
서울중앙지검 검찰수사관 김가영은 그들 세계에서 열쇠로 통한다.
그 어떤 흉악한 피의자도 그녀 앞에만 앉으면 순한 양이 되고 경찰 조사에서는 끝까지 아니라고 우겼던 말이 네, 맞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인정합니다. 서명을 날인하고 도장까지 꾹.
이렇게 180도로 뒤바꾸는 초능력을 지녔다.
범죄자의 잠긴 입을 여는 진실의 열쇠. 그것은 마법도 아니고 초능력도 아니었다.
가영의 고민은 늘 범죄자들의 교화와 갱생에 있었다. 사람은 바뀐다고 믿었다. 그녀는 그저 남들이 보는 표면적인 범죄의 현상을 찢어발겨서라도 그 안으로 들어가 이면에 감춰진 것을 들여다보았고 어쩌다 이 분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것에 주목했다. 그러면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 참 슬프고 안타깝기 짝이 없고 딱하다. 거기에 그녀가 가진 최고의 초능력. 경청의 대화기술은 피의자들의 꽁꽁 얼어붙어 있던 차가운 마음을 봄날 햇살에 녹아내리는 눈처럼 따뜻하게 녹여주었다.
몽키스패너로 어린아이의 머리를 때려 구속된 피의자, 아무도 없었는데 조선족 세 명이 위협해서 칼을 휘둘렀다고 우기는 멀쩡하게 잘생긴 아저씨 등등.
경찰조사에서는 바락바락 우기던 이 사람들도 그녀 앞에만 앉으면 마음을 열고 그 안의 모든 것을 쏟아냈다.
그녀의 취조과정을 옆방에서 모니터링하고 있는 부장검사는 그저 감탄할 뿐이다.
“잘해. 정말 잘해. 보통이 아녀.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나 신기해. 저 할아버지도 곧 슬슬 불고 자백하겠네. 서명할 시간이 다 됐어. 나는 집에 갈 시간이 다 됐고.”
부장검사는 콧노래를 부르며 퇴근준비를 서두른다.
가영은 예쁜 소품들을 좋아했고 직장 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그러면 자신의 외모라든지 겉모습에 신경을 쓸 법도 한데, 그녀는 딱히 남들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 할 일만 소신껏 열심히 하며 사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지금은 그저 모든 것이 좋았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평온한 삶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일생일대의 대사건이 발생한다.
“김수사관. 공문 하나 보낼 테니까 확인해 봐.”
“뭔데요?”
“직접 확인해 봐. 나도 뭐라 말 못 하겠어. 어쨌든 자네 선택이야.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 대답만 확실하게 해 줘. 답변공문은 내가 보낼 테니까.”
수사업무 협조요청. 공문서 00호.
발신인 국가안전기획부 특수수사 제1 과장 이병헌.
안녕하십니까? 김가영 수사관님. 저는 국가안전기획부...
공손한 인사를 시작으로 작성된 공문서의 내용은 간단하게 말해 수사업무 협조에 관한 요청 건이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면 마약유통과 살인 그리고 뇌물혐의의 피의자가 도대체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의자 수사에 수사관님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과 그 능력은 저희 수사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부장님!”
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장검사실 문을 확 열고 소리쳤다. 부장검사가 화들짝 놀란다. 뭔가 있다. 죄를 지은 사람의 표정이다.
“이 사람 저 어떻게 알아요?”
“그게...”
술자리에서 안기부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자기한테 이런 유능한 수사관이 있다고 막 자랑했다고 한다. 그런 뒤로 이런 공문이 날아왔다고.
“아 진짜!”
“워워.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바로 공문 보낼게. 보낸다?”
가영이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이것이 그녀의 삶의 균형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산타워, 국가안전기획부 별관지하.
가영이 안기부직원의 안내를 받고 따라 내려간 곳은 철문이 열리자 피비린내가 가장 먼저 진동했고 습했으며 그 습한 공기에는 라면냄새와 소주냄새 그리고 담배냄새까지 뒤섞여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거기에 때 묻은 하얀 팬티만 입은 채로 돼지 바비큐처럼 매달려 회전에 따라 물에 얼굴이 잠기는 고문을 당하고 있는 피의자까지.
인권이란 것이 있다.
범죄사실이 밝혀지지도 않은 피의자를 상대로 이럴 수는 없다. 이것은 감금에 강압수사에 폭력수사다.
시대가 바뀌어나가고 있다. 한 달이 지나면 대선을 통해 문민정부가 들어설 것이다. 한데, 안기부 이놈들 아직도 이러고 있다니.
“서울중앙지검 김가영 수사관님 오셨습니다.”
가영을 안내한 직원이 철문을 닫고 나간다. 잠깐만, 문소리가 잠긴다. 가영이 고개를 돌려 들어온 입구를 보다가 다시 매달린 피의자를 보았다.
“당신들 뭐야? 저 사람 당장 풀어줘!”
“김가영 수사관님?”
건달인지 마약중독자인지 형사인지 모를 한 남자가 그녀를 불러놓고는 소주병을 들고 물처럼 꿀꺽꿀꺽 마신다.
“네. 서울중앙지검 김가영 검찰수사관입니다. 업무협조요청 건으로 왔고요. 하지만 이건 아니네요.”
“뭐가요? 뭐가 아닌가요? 이 새끼요? 지금 이 새끼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거죠?”
남자는 가영이 보는 앞에서 매달린 피의자의 성기를 소주병으로 툭툭 친다.
“그만하세요.”
“사람을 죽인 놈이에요. 마약청정지역인 이 나라에 10킬로 분량의 히로뽕을 풀었고요.”
“그건 법정에서 밝혀질 일입니다.”
“네 그래서 증거를 찾아 확보했죠. 자백만 남았고요.”
“강압, 폭력수사에 의한 자백은 인정받지 못해요. 그만하세요. 마지막 경고입니다.”
“잠깐만요. 수사관님. 지금 저 돼지새끼가 불쌍해요?”
“돼지새끼가 아니고 사람입니다.”
“그럼 나는 뭐로 보이나요?”
“당신이 더 범죄자 같네요. 관등성명 대보세요.”
“아이고 네.”
남자가 뮤지컬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영에게 인사를 한다. 담배를 물더니 후! 하고 가영의 얼굴에 연기를 내뿜었다.
“인천서부지구 강력계 형사 정해인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수사관님.”
남자가 킥킥거리자 가영이 숨을 고르며 주위를 다시 돌아본다. 2명의 남자가 더 있다. 정장차림을 보니 안기부직원들이 맞다. 그러면 공문을 보낸 자는?
바로 그 때다. 잠겼던 철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아이고 수사관님 오셨습니까?”
공문을 보내온 자다. 안기부 특수 1 과장 이병헌.
“이거 제가 미리 와 있어서 수사관님께 설명을 좀 드렸어야 했는데 오는 길에 차가 빵꾸가 나서 그거 손보다 보니까.... 인사들 했어? 야 이 녀석들아? 인사했냐고?”
네.
안기부직원 두 명이 건성으로 대답한다.
“과장님 피의자 저렇게 대하면 안 돼요. 일단 먼저 풀어주세요.”
가영이 정해인을 보았다. 저 수염만 없으면 아직 어린 녀석이다. 독기로 가득한 눈매도 뭔가 큰 사연과 아픔을 가지고 있다.
“수사관님 제가 설명을 쭉 드리겠습니다.”
“밖에서 듣죠.”
“아. 못 나갑니다.”
“네?”
“서명을 해줄 때까지는 못 나갑니다.”
“뭐요? 이런 미친! 이거 완전 미친놈들 아냐?”
가영이 참고 참아왔던 분노를 터트리고 말았다. 정해인이 키득거리며 웃더니 소주를 병째 들이켠다. 가영이 계단을 밟고 올라가 철문을 잡아 열었다. 꼼짝도 하지 않으니 발로 찬다.
“이거 열어!”
정해인이 양쪽 어깨를 으쓱한다. 사람 놀리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해인 형사. 저 눈가의 독기와 수염만 없으면 예쁜 남자다. 무엇이 저 남자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이병헌이 계단 밑에서 가영을 올려다보며 내려오라고 손짓한다.
“자자. 이리 와서 얘기 더 들어보세요.”
“더 들을 말 없어. 당장 문 열어. 이거 감금이야. 감금죄에 대해 설명해 줘?”
“아휴, 잘 알죠. 근데요 수사관님. 감금죄보다 여기 정해인 형사 아내와 딸이 저 돼지새끼한테 어떻게 죽었는지 지금부터 제가 차근차근 설명을 해드릴 테니까요. 그걸 듣고 저 돼지새끼는 무슨 죄가 적용되는지 그것부터 설명 좀 해주시렵니까?”
“네?”
가영이 깜짝 놀랐다. 이번에는 정해인이 가영을 보지 않았다. 정해인이 한숨처럼 내뱉은 담배연기가 전구를 휘감는다.
“이놈 배후에 이경영의원이 있습니다. 이제 한 달만 지나면 대통령이 될 김영순의 최측근 이경영이요. 저 돼지새끼의 주인. 마약카르텔에 각종로비와 살인사주까지. 우리 안기부가 뭐 예전처럼 아직도 멀쩡한 학생들 붙잡아 때리고 간첩 만들고 그러는 줄 아시나 본데요. 우리 이거 해결 못하면 영원한 불명예로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겁니다.”
“이경영의원이 그렇다는 증거가 있나요?”
“여기 이만큼 확보되었습니다.”
“그거 다 불법수사로 확보한 거잖아요!”
“맞아요. 하지만 진실입니다. 제 모가지 걸게요. 해인이 저 친구! 이경영의원 수사하다 소중한 사람 잃었고요! 저 역시!”
“에이 씨발 그만해! 그냥 돌려보내!”
정해인이 소주병을 던져버린다. 그 유명한 동화 있지 않은가. 눈의 여왕. 유리 파편이 가영의 눈에 들어와 박히는 것만 같았다. 가영이 계단을 밟고 다시 내려왔다.
“일단 풀어줘 보세요. 제가 얘기 좀 해볼게요.”
매달려 있던 피의자가 풀려나 가영의 앞에 앉았다.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다. 이래서는 피의자를 감화시키는 그녀만의 초능력, 경청의 능력이 발휘되지 않는다. 눈빛을 보면 안다. 이 피의자는 여전히 반성하고 있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정해인 형사를 보려고 얼굴을 돌렸는데 퉤! 하며 침이 날아와 뺨에 달라붙었다.
냄새가 고약했다. 피 냄새와 똥냄새까지 섞여 있었다.
가영이 그 침을 닦지도 못하고 피의자를 보는데 킬킬 거리며 웃는 그는 진정 악마였다.
눈앞이 노랗게 보인다. 속이 울렁거리고 구토증세가 밀려와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데 정해인 형사가 피의자를 두들겨 패면서 소리쳤다.
돌려보내. 보내 드리라고!
그 목소리가 꿈처럼 들려왔다. 철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온 가영은 속의 것을 모두 다 토해내고 말았다.
철문이 닫혔다.
돌아가면 그만이다. 돌아가면 좋아하는 예쁜 소품을 사서 모으고 부장님께 칭찬받고 동료들이 사주는 밥을 마다하지 못하는 척 얻어먹으며 살아간다.
그러면 된다. 하지만 왜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저들이 원하는 서명과 도장 날인은 이 모든 과정에 불법은 없었다는 것을 자신이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폭력의 서명. 폭력의 공범이다.
강아지도 안다. 주인이 자신의 엉덩이를 감정을 실어 툭 때린 것인지 아니면 예뻐서 툭툭 건드리는 것인지. 가영은 돌아가지 못했다. 그녀가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는 복잡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듣는 자들은 안다. 서명을 위한 두드림이 아니다. 서명할 생각이 전혀 없다. 매우 신경질적이다.
“문 열어!”
철문이 열렸다. 하지만 정해인이 앞을 가로막고 서있다. 그 사이를 이병헌 과장이 지나쳐 철문 밖으로 나간다. 워워, 나 일 있어서 잠깐 다녀올 게 싸우지 마라면서.
“그래서 서명을 하겠다는 겁니까?”
“무턱대고 서명하는 것도 웃기지 않나요?”
“하나도 안 웃깁니다. 서명을 하실 거면 들어오시고 안 하실 거면 오셨던 길 그대로 되돌아 집으로 가시면 됩니다. 안 잡아요.”
“그렇게는 못하겠네요.”
가영이 해인의 어깨를 밀치고 막무가내로 들어와 피의자 앞에 섰다. 가영의 요구대로 물고문을 받고 있던 피의자가 풀려나 취조용 책상 앞에 앉았다. 가영과 다시 마주 앉았다. 상대는 이미 실성했다. 미친놈처럼 실없이 웃기만 했다.
다시 초능력을 발휘할 시간이다.
이름 박휘순. 서류를 통해 피의자의 이름을 확인한 가영이 머리를 풀어 정리한다. 피의자가 힐끗 보는 순간 가영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고무줄로 머리를 질끈 묶었다. 이것은 상대에게 나의 결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휘순 씨.”
휘순이 대답은커녕 고개를 돌린 채로 가영을 보지도 않는다.
“저 보세요. 박휘순 씨.”
여기까지다. 더 이상 말하면 안 된다. 가영은 기다린다. 매우 중요한 시간이다. 해인도 뒤에서 가만히 지켜만 본다. 저 여자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야?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조급함은 실책을 부른다. 기다려야 한다. 상대는 알고 있다. 내가 똑바로 보고 있다는 것을.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선거가 한 달 남았다.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가영이 서류에서 확인했었다. 이 지독한 안기부 새끼들은 이경영의원을 국보법을 위반한 빨갱이로 까지 엮어둔 상태다. 가영이 서명을 하면 안기부는 국보법 위반을 가져가고 마약카르텔과 뇌물, 각종로비와 살인교사는 대검 중수부가 사건을 이첩받아 불체포특권이고 뭐고 현직 의원을 상대로 구속기소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이경영의원은 공판을 통해 실형이 확정된다. 최소 무기징역이다. 항소도 소용없다. 박휘순도 마찬가지다. 믿고 있던 동아줄까지 끊어진다. 그러니 침을 뱉고 그냥 가라 제발, 나의 지옥은 한 달 남았다고 소리 없이 외치고 있는 것이다. 가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 때다.
휘순이 가영을 보는 대신 두 손을 신경질적으로 책상 위로 올렸다. 수갑이 채워져 있다. 지금이다. 상대가 움직였다. 상대는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다.
“박휘순 씨 미란다원칙. 피의자의 권리에 대해 들으셨나요?”
“아, 정말!”
정해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영은 자신을 노려보는 정해인 형사의 시선을 외면한 채 박휘순의 다리를 보았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듯 달달 떨고 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진술을 거부하는 권리 즉 묵비권을 행사할 수…”
“그만해!”
정해인이 박휘순의 머리카락을 통째로 움켜쥐고는 책상에 박아버린다. 그 한방에 박휘순은 정신을 잃고 의자와 함께 쓰러져 옆으로 무너진다.
“정해인 형사!”
가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뭐!”
“당신들은 지금 모두 다 불법을 저지르고 있어!”
“그래서 뭐? 어떻게 할 건데? 아니 당신은 도대체 누구 편이야? 왜 범죄자 편을 드는 건데? 수사관이면 수사관답게 굴어. 당신이 이 돼지새끼 변호사야? 몇 번을 말해! 이 새끼 사람을 죽인 새끼라고! 그것도 내 마누라와 내 딸을! 당신이…!”
주위가 고요해졌다. 그다음에 나올 말을 모두가 다 알고 있기에 숙연해졌다. 정해인이 감정이 격해져 더 이상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은 꼭 해야겠다는 다짐이다. 검지를 세우고 흔든다. 이것은 가영을 향한 경고다.
“당신이 그 고통을 알아? 그 지옥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게 어떤 건지 상상이나 할 수 있어?”
정해인이 더 이상 내뱉지 못하고 스스로 화를 삭인다. 혼자 시팔 거리며 담배를 찾아 물었다.
“형사님. 그러니까 자백을 받아내려는 거잖아요.”
정해인이 가영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다. 성냥으로 불을 붙인다. 한번, 두 번. 세 번…
성냥이 부러지고 불이 켜지지 않으니 신경질적으로 성냥갑을 벽에 던져버린다.
“이 새끼가 자백을 할 거 같아? 바랄 걸 바라세요.”
“할 수 있어요.”
“뭔 수로요?”
“방해나 하지 마요.”
정해인이 가영의 앞으로 다가온다. 광기에 사로잡힌 눈, 상처받은 슬픈 짐승이다. 사냥개가 그의 별명이다. 박휘순을 지금 이 자리에 잡아온 것도 사냥개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영은 여기까지 알지 못한다. 그저 지치고 상처받고 두려움과 분노가 복잡하게 교차한 채로 세상을 향해 울부짖는 한 마리 짐승으로만 보였다.
“수사관님. 딱 잘라 말해봅시다. 지금 수사관님은 저 새끼가 사람으로 보이죠? 그런 거죠?”
“그럼 사람 아닌가요?
“사람 아니에요. 이빨을 감추고 수사관님 머리 위에 올라타서 살길만 찾고 있는 교활한 늑대입니다. 이용당하지 마세요.”
가영이 순간 다리가 풀려 휘청거렸다. 초능력이다. 가만 보니 초능력을 엄한 곳에 쓰고 있었다. 방해요소를 제거할 수 없다면 내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밖으로 나간 이병헌 과장이 돌아오기 전에 끝내야 할 일이었다.
“아.”
가영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곧 쓰러질 것만 같은 것이 너무 약한 여자의 여자다. 정해인의 표정이 바뀌었다. 뭐지? 왜 갑자기 약한 척 하지?
“놀랐나… 거기 물 좀 주시겠어요?”
뒤편 계단 아래를 지키고 있는 안기부직원 중 뚱뚱한 대머리가 벌떡 일어나 주전자를 들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저놈은 됐다. 한 놈은 해결되었다.
컵 따위 필요 없다. 가영이 주전자를 받아 입을 대고는 벌컥벌컥 마셨다. 이 시간은 길수록 효과적이다. 가슴도 활짝 펴고 앞으로 내민다. 고개를 과감하게 뒤로 젖히고 어디 볼 테면 보라. 나 역시 당신들과 다를 바 없다. 가영의 눈에 정해인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지만 녀석도 분명 걸려들었다. 확신한다.
가영이 주전자를 다 비우고는 대머리에게 휙 던져주었다. 나이스 캐치.
“정해인 형사님.”
“네?”
“소주 한 잔 합시다. 거기 소주 줘 봐요.”
대머리 뚱보는 완전히 끝났다. 말을 아주 잘 듣네. 빠른 속도로 소주를 가져온다.
가영이 소주를 책상 모서리 끝, 아슬아슬한 선상에 내려놓고 잔을 들었다. 정해인이 술을 따라주지 않으면 실패다. 하지만 그럴 일 없다.
역시나 정해인이 술을 따른다. 가영이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빈 잔을 건넨다. 눈이 마주쳤다. 자 이제 나의 잔을 받아라. 어서.
정해인이 잔을 받았다. 끝났다. 정해인이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한 잔을 들이켜는 그때였다.
“형사님. 전 말이죠. 이런 생각을 해봐요.”
“?”
“형사님이랑 눈 오는 거리를 걷고 분위기 좋은 찻집에서 차도 마시고요.”
“여보세요! 내가 그쪽이랑 왜 거리를 걷고 차를 마십니까?”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억양에도 행간이 있다. 딱히 듣기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런 곳과는 다른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안전하고 행복한 세상. 그런 세상에서 좀 걷고 차도 마시고 좋잖아요. 우리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지켜 나가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고요.”
정해인이 술잔을 비운다. 표정만 보아도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는 악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영이 기절한 박휘순을 내려다보았다.
“이 사람도 한 때는 어린아이였겠죠.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정해인이 술잔을 건네려다 다시 가져가 자작한다. 연달아 두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바꿀 수 있습니다. 제가 평화로운 방법으로 자백을…”
“잠깐만요. 바꾸다니요?”
뭐지? 뭔가 불길한 징조다. 하지만 가영은 밀고 나간다.
“이 사람이요.”
“네?”
순간 정해인이 가영을 삐딱한 눈으로 쳐다본다. 요리조리 살피기까지.
아, 젠장. 이 돼지새끼라고 했어야 했다. 가영이 자신의 실수를 눈치채고 인정한 그 때다. 그러면 그렇지.
“아. 이제 보니 수사관님은 이 돼지새끼가 바뀔 수 있다고 보는구나.”
“네. 전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그니까 그건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죠.”
“박휘순 씨도 마음 어딘가 에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네?”
아차! 싶었다. 역시나 가영이 정해인의 표정을 살피는데 뒤에서부터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들었어? 범죄자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대.”
“양심?”
“어.”
자기들끼리 막 웃기 시작한다.
“들었어요? 지금 이 말 듣고 웃는 거죠?”
정해인이 뒤돌아 물었다.
“어. 그래. 들었어. 양심의 가책을 느낀대. 범죄자가.”
기어코 안기부 직원 둘은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한다. 대머리 뚱보가 제일 크게 웃고 있다.
정해인도 어이가 없어서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아! 수사관님 너무 재밌으시다. 양심의 가책. 수사관님! 이런 놈들은요 양심 자체가 없어요. 아 눈물 나. 양심이 있으면 이러고 있겠어요?”
가영이 두 눈을 감고 말았다.
“수사관님. 이놈들은 양심이 없어서 반성도 안 해요. 아니 못해요. 이놈들에게 반성이란 게 있다면 그저 어떤 처벌이 떨어질까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징벌의 시간 속에서 거짓으로 척하는 것뿐입니다. 이놈들이 뭘 어떻게 반성하겠어요. 그 처벌의 시간이 너무 혹독하니까, 척! 그냥 반성한 척하는 거죠. 감형도 노리고요. 이놈들은 그게 반성입니다.”
누가 모르냐, 이 새끼야. 가영이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형사님. 제 말은 어떻게든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백을 이끌어 내볼 테니까 저를 한번 믿어달라는 겁니다. 아까 미란다원칙 들먹인 것도 다 작전…”
“네, 알았어요. 해보세요. 그 믿음이 박살 나는 모습 보고 싶네요. 제가 봤을 때는 말이죠. 수사관님은 직접 당해봐야 알아요.”
정해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발로 박휘순의 머리를 툭툭 치며 깨운다. 박휘순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마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다.
“다 나가주세요.”
가영이 정해인을 노려보았다. 정해인이 양쪽 어깨를 으쓱하더니 안기부 직원과 함께 철문을 열고 나갔다.
문을 닫기 전,
“수사관님. 이 일 끝나면 나도 죽을 결심이었는데요.”
“?”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 일 잘 끝내고 밖에서 눈 오는 거리 좀 걷고 차 대신 소주 한잔 합시다. 무슨 일 있으면 소리쳐요. 여기 있을 테니까.”
철문이 닫혔다.
심쿵. 가영은 심장이 쿵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예쁜 남자다. 날 믿어주고 있다. 어쩌면 저 남자야 말로 범죄자들이 제발 양심의 가책을 받고 변하길 더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박휘순이 자백과 함께 공판에서 증인으로 나서겠다는 조건으로 원하는 건 피의자신병이동조치였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만 벗어나게 해 주면 이경영의원을 비롯한 배후에 대해 모든 것을 다 불겠다고 했다.
피의자이동조치.
이병헌 과장과 정해인이 이 결정을 두고 서로 반대의견을 내세웠다.
“안 돼. 우리는 중수부랑 공조해서 이경영만 공판에 세우면 돼. 서명이랑 도장만 받아서 대검으로 넘기면 쉽게 끝날 일이라고. 왜 자네답지 않게 돌아가려고 해?”
“한번 믿어보죠. 네?”
“해인아. 너 지금 저 수사관을 믿겠다는 거야? 아니면 저 사람이 하는 방식을 믿어보겠다는 거야?”
“둘 다요.”
“안 돼. 이동조치는 절대로 안 돼. 지금도 주변을 도는 놈들이 있어. 박휘순 신병이동조치는 대가리 잡아들이고 난 다음이야. 지금은 안 돼.”
“공판에 증인으로 나서겠다잖아요.”
“야! 정해인! 너 그걸 믿어? 저 교활한 새끼 여기서 어떻게든 나가려고 거짓말하는 거잖아! 너 정신 차려!”
“형. 대선이 코앞이에요. 저 여자 절대로 서명 안 해요. 김영순후보 대통령 되면 이경영 못 잡고요. 이경영이 못 잡으면 오히려 우리가 역으로 당해요. 불법에 감금에 폭력까지. 저 여자 말이 맞아요. 어쩌면 이 방법이 안기부 해체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도 그나마 명예롭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아닐까요?”
이병헌이 장고를 거듭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박휘순의 이동조치가 결정되었다. 이 작전은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안기부의 호송차량 2대는 서울구치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무장 세력의 공격을 받았다.
남산타워를 돌아 내려오는 길을 양쪽으로 봉쇄한 무장 세력은 칼과 도끼 그리고 쇠파이프로 차량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고 이를 저지하려는 안기부 직원은 현장에서 즉사할 정도로 참혹한 칼부림이 일어난 것이다.
이병헌이 재빨리 서울구치소와 대검 중수부에 이 사실을 알려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정해인은 가영을 보호하기 위해 공중전화부스로 이동해 가영을 그 안에 밀어 넣고 싸우지만 역부족이었다.
“와! 와 이 새끼들아!”
“어이 사냥개. 꼴좋다?”
무장 세력의 우두머리가 해인을 알아보고 비웃는다. 해인이 온몸에 칼을 맞고 뒤돌아 가영을 보며 무릎을 꿇을 때, 놈이 긴 칼을 해인의 등에 박았다.
가영의 눈앞에서 해인이 죽어가고 있었다.
부스 입구를 막고 가영만큼은 지키겠다는 신념 하나로 버텨내고 있는 것이다.
멀리서부터 사이렌소리가 들려온다. 무장 세력들이 물러난다.
“그러게 서명만 했으면 쉽게 갔잖아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무사해서요.”
해인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안 돼....”
도로에 남은 것은 피투성이의 해인을 품에 안은 가영의 울부짖음뿐이었다.
서울대학교병원.
한쪽 팔에 깁스를 한 채로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는 가영의 뒤로 이병헌이 나타났다.
“갑시다.”
“어디를요.”
“따라와 보면 알아요.”
가영이 이병헌을 따라간 곳은 서울 외곽 아파트공사가 중단된 곳이었다. 남산타워 아래에서 도망친 박휘순과 해인을 죽인 무장 세력의 우두머리가 붙잡혀 발가벗겨진 상태로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이병헌이 비인가 용병세력을 고용해 놈들을 산 채로 붙잡아 온 것이다.
이병헌이 가영의 손에 총을 쥐어주었다.
“서명만 했어도 해인이 그 친구 그렇게 안 죽었어요.”
가영이 그 말을 듣자마자 거꾸로 매달린 박휘순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린다.
박휘순이 낄낄거린다.
“놈이 수사관님을 가지고 논거죠. 이경영을 먼저 공판에 세우는 게 맞았어요.”
가영은 해인의 마지막이 떠올라 이를 악물었다. 진짜 죽여 버리고 싶었다.
“우리 착한 수사관님 나 진짜 쏘게요?”
박휘순이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도 장난을 친다. 가영이 총구를 놈의 이마에 더 깊숙이 밀어 넣는다.
“뭐여 진짜 쏘겠네?”
하지만 가영은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총으로 놈의 대가리를 사정없이 내려칠 뿐이었다. 돼지새끼라는 말도 아까웠다. 인간이 아닌 그 어떤 짐승만도 못한 악마의 머리를 가영은 모든 감정을 다 담아 쏟아내듯 내리쳐버렸다.
눈물이 난다.
수사관님은 당해보지 않아서 몰라요. 직접 당해보면 알아요. 해인이 술잔과 함께 보내온 미소가 떠올랐다. 공중전화 부스를 온몸으로 막고 탓하던 목소리도 떠올랐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무사해서요.
대선 보름 전.
이경영의원이 국회에서 긴급 체포되었다. 국가안전기획부 수사부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공조수사가 이루어낸 결과였다.
가영이 법정에서 증언한다.
“네. 옆에서 직접 지켜보고 서명한 것입니다. 모든 수사과정에 불법은 없었습니다.”
재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의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가영은 답할 수 있었다.
정의는 당해본 사람만이 아는 것이라고.
fin
*이 글에 사용된 소재의 일부는 위버멘쉬작가님께 허락을 받고 일상소곡집 Part3과 Part5에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