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는 이제 졸업
내가 중학교 때 건담에 미친 건 오직 선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선이 너무 좋았다.
그 선은 유혹의 선이었고,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도 다치고 건담도 다치니까 애지중지하며 지켜만 보았던 것 같다.
말 그대로 지켜야 할, 지켜주어야 할 선인 것이다.
오직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만 내 다른 인생 다 포기하고 겨우 숨만 쉬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오늘 갑자기 선이 떠오른다.
난 살짝 똘+아이라서 그런지 내 글의 이야기 속 주인공에게 딜레마를 거는 걸 좋아한다. 여기에서 딜레마란 매혹적이고 매력적인 것을 말한다. 주인공이 그 어느 쪽을 선택해도 반드시 손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지독한 상황인데, 이게 매력적이고 매혹적이어야 한다. 지켜보는 사람 짜증 나게 하는 것은 딜레마가 아니다. 그냥 쓰레기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에게 매혹적인 딜레마를 거는 일은 사실 훈련되지 않으면 힘든 일이다.
근데 계속하다 보면 또 그리 어렵지는 않다.
최근에 완성한 <폭력의 서명>은 주인공의 매혹적인 딜레마가 굉장히 잘 걸려 있고, 잘 살아 있는 글이라고 스스로 자부한다. 뭐 충무로 영화 제작사나 이름 높은 문학출판사에서 연락을 해올 정도는 아니지만 나 스스로 참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기특하다. 충분히 만족한다.
그래서 폭력의 서명을 마무리한 어제부턴가 딜레마 말고 다른 매력적인 것은 없나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다 방금 선의 매력이 떠올라 아주 오랜만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사람은 선을 넘으면 안 된다. 그것이 사랑이든 우정이든, 부모자식 간이든, 사회에서 만난 어떤 동료이든 간에 사람은 선을 넘으면 서로 골치가 아파진다.
그래서 갑자기 이런 얘기를 만들고 싶어서 여러 소재를 찾아 나서려고 한다.
어쩌면 하나의 선 앞뒤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힘차게 살아나가고 있는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딜레마보다 훨씬 더 매혹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근데 이건 화양연화다. 이미 세상에 나왔다.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선을 넘어도 손실, 참고 안 넘어도 손실 이러면 또 결국엔 딜레마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 물론 처음에는 레퍼런스가 될 것이다.
첨밀밀에서 두 사람이 그렇게도 좋아했던 등려군의 사인을 여명이 등 전체에 받고 돌아온다. 여명과 장만옥은 서로 지켜야 할 선이 있기에 그대로 헤어진다.
신호는 아직 빨간불이고 운전대를 잡고 있는 장만옥은 점점 멀어져 가는 여명과 그의 등에 새겨진 등려군의 사인을 보고만 있다. 등려군은 두 사람을 하나로 이어주었다. 물론 여기까지는 정신적으로만 이어주었다.
그때 장만옥이 운전대에 기댄다는 것이 클랙슨을 울려버린다.
그래서 여명이 자신을 부른 줄로 알고 돌아와 두 사람은 선을 넘고 진한 키스를 나눈다. 그렇게 서로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랑을 다시 확인한다.
난 이 장면이 너무나도 좋아 보고 또 보고 술에 취해 다시 보고 그런다. 보고 또 보아도 정말 좋다.
치매에 걸려도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선은 하나의 유혹이다. 딜레마가 선택의 고통이라면 선은 존재의 고통이다.
어떤 보이지 않는 하나의 선을 두고, 그 앞뒤에 서 있는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를 한 번 해보고 싶다.
화양연화도 나왔고, 첨밀밀도 나왔으니 난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이게 살짝 설레기도 하고, 진행하다가 내 감정에 스스로 무너질까 봐 두렵기도 하지만 난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왜냐면 난 작가니까.
무대에서 노래하다 혼자 감정에 격해서 울어버리는 그런 아마가 아닌 프로작가니까.
그러니까 아슬아슬한 선상에 위치해 있더라도 이 위대한 작업을 반드시 꼭 해내야 하는 사명이 있고, 결국엔 해내는 작가니까.
그래서 난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기대하시라. 개봉박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