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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숏츠

화려한 외출

글이 안 써지는 날

by 임경주


오늘 글을 한 줄도 못썼다. 아니, 단 한 글자도 못썼다.

루틴이 깨졌다. 왜 깨졌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미 깨질 준비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난 하루의 글을 만족할 만큼 다 쓰지 않고 내일 쓸 글을 조금씩 남겨둔다. 그게 내 루틴이다. 자면서도 그 남겨둔 글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써야 할지를 꿈을 꾸듯 설계한다.

오늘도 컴퓨터를 켜기만 하면 끝날 일이었다. 꿈꾸는 동안 내 머릿속에 나열해 두었던 것들을 컴퓨터 앞에 앉아 활자로 정리만 하면 된다.

근데 오늘은 이 일을 하는 게 죽기보다 싫은 것이다. 어쩌면 오늘은 하루 종일 방구석에 처박혀 글을 쓰기보다는 서울을 가고 싶었던 것 같다.

근데, 또 웃긴 게 강을 건너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까 겁부터 났다.

그 강을 건너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도 같고 강을 건너면 좋겠지만 감당해야 할 부분도 분명 염두했던 것 같다. 강은 하나의 선이다.


난 옷을 하나 사면 그 옷만 죽어라 10년을 입는데 그 10년을 입어온 옷들을 다시 입어보면서 한 사람을 떠올려보았다. 거울 속의 나는 이 옷을 10년이나 입고 있냐고 묻지만, 내가 떠올린 그 사람은 나를 모르니까 내 10년 옷도 모른다. 평소에도 나와 내 글을 예쁘게 봐주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입고 가도 날 예쁘게 봐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이게 다다. 전부다. 그냥 내 나름의 화려한 외출을 하고 싶었다.

솔직히 루틴이 깨졌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루틴을 따지기 전에 내 나이와 내 주제파악을 먼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서울을 안 가면 다시 앉아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작년만 해도 건강했다.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 가장 빨리 알아보는 방법이 식사시간이 늦어지는 거라고 했다.

언제부턴가 외모에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칙칙한 어둠 속으로 나를 방치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맛탱이>가 갔고, 숨만 쉬고 살아간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지만 입만 바른 소리는 솔직히 다 개소리로 들린다.

예술가라면, 내가 작가라면 주석도 달지 말고 제발 자기 작품 하나로만 말했으면 좋겠다.

도대체 뭔 설명이 필요하단 말인가. 자기가 만들어낸 작품이 그렇게 미덥고 의심스럽고 설명이 필요하다면 그 작품은 미완성이라는 말이다.

제발 작품으로만 말하라.

주변이 온통 주둥이다. 어딜 가나 다 잘난 인간들이다. 네 명이 앉아서 어울려 노는 술집에서도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다. 이럴 때 보면 사이비교주가 진짜 대단한 인간인 거다. 이렇게 잘난 인간들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빼가는 걸 보면 엄청난 인간인 것이다.

오직 의미 있는 것은 행동뿐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감상도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골프경기 관람객은 갤러리다. 개뿔도 모르면서 뭐가 대단하다고 하는 건지 뭐에 감동을 받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붓글씨를 쓰실 때 화선지 바닥에 당연히 깔아야 할 모포에 매직으로 모눈종이처럼 구획을 나누어 사용하셨다.

아버지 전시회장에서 누군가가 어떻게 저렇게 칼처럼 글자를 맞추어 쓸 수 있냐고 감탄하는 걸 보고 속으로 에라 병신아 그랬었다. 서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와서 즐기고 남의 붓글씨 예술과 혼에 대해 주둥이를 나불거린다. 우리 예술가들은 도대체 얼마나 더 혹독한 시련을 거쳐 더 완성된 작품을 세상에 내놓아야 하는 걸까? 그것도 쥐뿔도 모르는, 자화자찬하는 돼지들 앞에.


작년 가을이었다. 오래간만에 바람 좀 쐬려고 속리산 법주사를 찾아갔었다. 정확히 몇 살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갔을 때는 저 커다란 불상이 분명 없었다. 한데, 흉물스럽게 넓은 땅 중앙을 딱 차지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요란한 스피커 법문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 주변을 돌면서 내 새끼 제발 합격하면서 기도하고 돈을 바치고 지나가는 스님에게 큰스님, 큰스님 하는데 도대체 뭐가 커서 큰스님이라고 하는지 난 정말 모르겠다.

거시기를 봤나? 그래서 그게 커서 큰스님인가?

불교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내가 찾아본 부처의 가르침 그 어디에도 숭배와 복을 바라는 기복기도는 없다.

세상이 다 아사리다.

그래서 나 같은 인간은 그냥 집구석에 틀어박혀 글이나 쓰고 내 글을 통해 누가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어주면 고마운 거고 아니면 마는 거다.


그래도 오늘은 정말 화려한 외출을 하고 싶었다.

사람이 그렇지 않은가? 내 글을 사랑해 주는데 그 사람이랑 마주 보고 앉아서 차 한 잔 마시는 거, 이게 그렇게 잘못된 생각인가?

이건 내 존재에 대한 확인이다.

머리는 미용실을 언제 갔는지도 몰라 흰머리가 새하얗고 얼굴엔 술독이 올라 빨갛다.

그래도 예뻐해 주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10년 내내 입는 옷을 또 꺼내 입어보았다.

에라, 모르겠다. 가자.

하지만 한강을 건널 용기는 솔직히 없었다.

그래서 오늘 화려한 외출은 결국 술과 안주만 사 오는 걸로 끝났다.

결국엔 또 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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