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검(快劍) #5

혈마(血魔)의 관

by 임경주



“네놈... 지금 나의 검을 보고도 그딴 소리가 나오느냐!”

지존보는 남궁평을 힐끗 보더니 다시 점소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여기 혹시 이 아이의 이모라는 분계십니까? 여기요? 거기 주방에 계신 분들도 이쪽으로 와서 좀 봐보세요? 누가 이 아이 이몬가요?”

남궁평의 검 끝이 부르르 떨렸다.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 고수의 품격 따위 이제는 없었다. 객잔 바닥에는 그가 내뿜는 살기로 인해 서리가 내릴 정도였다.

하지만 지존보는 설아가 손에 꼭 쥐고 있는 나무 무사인형을 내려다보며 이제는 헤어져야할 시간이라고 말해줄 뿐이었다.

“이모 만나면 잘 살아라.”

“무사님....”

지존보가 등을 돌렸다.

“무사님!”

설아가 뒤에서 불렀지만 지존보는 돌아보지 않았다.

“감사했습니다!”

설아가 소리쳐 마지막 인사를 했다.

설아도 눈치가 있어서 안다. 이제는 정말 헤어져야할 시간이라는 것을.

하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였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누가 누굴 찾아왔다고요?”

그때다.

주방의 가려진 막을 걷고 단아한 차림의 여인이 걸어 나왔다.

그 기품이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이 어두운 객잔의 주인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뭐하는 여자지?

이곳은 험한 계곡의 벽 한 귀퉁이에 위태롭게 세워진,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를 정도로 아슬아슬한 객잔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경직되기 마련이다. 한데 발걸음 하나까지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곳에 오래 살면 적응이 되어 이렇게 자연스럽게 되는 걸까?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찻잔 조각들과 계곡 건너편 처참해진 불상을 무심하게 훑어보고는 지존보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설아를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넌 누구니?”

“이모?”

“내가 이모? 넌 누군데?”

“저 설아요!”

“설아? 모르겠는데?”

“이모 아닌가? 울 엄마가 이 객잔에 이모가 있다고 했거든요.”

설아의 주장에 여인도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글쎄다? 너 어디에서 왔어?”

“북방이요.”

“북방? 흠... 북방에 동생이 한 명 살긴 해. 너 엄마 이름이 뭐야?”

“울 엄마요? 여, 영란이요.”

여인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진짜야? 엄마 이름 영란 맞아?”

“네!”

“그럼 맞네! 오구 내 새끼! 엄마아빠는?”

여인이 자세를 낮추어 설아를 안아주었다.

“엄마아빠 오랑캐들한테 다 죽었어요! 으앙!”

“아이고 어쩌나!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여기 무사님이요!”

“아이고 무사님 감사합니다. 저는 설아의 이모되는 옥란이라고 합니다. 귀한 손님이 오셨군요.”

지존보가 퀭한 눈으로 옥란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내려 설아를 보았다.

이거 뭔가 냄새가 나도 엄청 난다. 느낌이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그 냄새와 이상한 느낌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뭔가가 이상하긴 이상했다.

옥란의 눈빛은 깊고 고요했다.

그 눈동자 속에는 남궁평의 서슬 퍼런 검기조차도 담기지 않았다.

지존보처럼 남궁평의 절세무학에 전혀 관심이 없는 눈인 것이다.

‘이것들이!’

남궁평이 주먹을 꾹 쥐었다.

이제야 깨달았다. 지금 자신을 상대로 등을 돌리고 선 채로 아무런 관심도 없는 저 사연 있는 무사와 여인과 꼬마를 포함한 이 객잔까지.

이들에게는 자신이 평생을 다 바쳐 익혀온 무공과 검술 그리고 지금까지 알고 살아온 무림의 상식이 통하지 않고 있다.

남궁평 역시 지존보처럼 옥란에게서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

“...”

지존보와 남궁평은 동시에 깨닫고 있었다.

이거 참 뭔가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발을 잘못 들인 거 같다는 것을.

지존보는 옥란과 설아가 얼싸안고 재회하는 광경을 보면서도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남궁평의 살기 때문이 아니었다.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이 객잔 전체를 감싸고 있는 기묘한 진동 때문이었다.

‘바람 소리가 아니다.’

객잔 처마에 매달린 풍경이 비명처럼 울리는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객잔 지하 어딘가에서 거대한 기(氣)의 소용돌이가 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자, 멀리서 오신 우리 은인께서는 일단 좀 씻고 쉬시지요. 이봐라 소이야! 무사님을 특실로 모셔라.”

옥란의 목소리는 상냥했으나 그녀의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설아를 안고 있는 그녀의 품에서 미미하게 풍기는 향내.

그것은 분내가 아니라 오래된 무덤에서나 날 법한 천년토향(千年土香)이었다.

“이봐, 이모라는 여자.”

지존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남궁평이 계곡을 오가며 검을 휘두를 때도 보지 않았던 그가 처음으로 옥란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 아이 엄마 이름이 영란이라고 했나?”

“네. 맞아요. 영란이 하나밖에 없는 제 동생이죠.”

“조카 성은 뭐지?”

설아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옥란의 눈동자도 순간적으로 굳었다.

객잔 들보에 매달린 채로 수거되지 않고 있는 홍령의 강선들도 파르르 떨렸다.

옥란은 대답 대신 설아의 머리를 더 깊숙이 껴안았다.

“무슨 소릴 하시는지... 우리 제부 성이...”

그때였다.

남궁휘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나섰다.

“이것들이 감히 대놓고 무시를 하고 있네? 오호라! 이 마교 놈들이 아예 판을 짜고 우리 남궁세가를 농락하는 것이로구나! 숙부님? 저 계집도 저 무사 놈도 다 한패입니다! 당장 목을 날려버려야 합니다!”

챙-!

남궁휘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지존보를 향해 쇄도했다.

남궁평은 제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카의 돌발 행동이 이 기괴한 상황을 타개할 칼날이 되길 바랐다.

“죽어라!”

남궁휘의 검이 지존보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지존보는 피하지 않았다.

그저 들고 있던 자청보검의 검집을 툭 들어 올렸을 뿐이다.

텅-!

가벼운 소리와 함께 남궁휘의 검이 튕겨 나갔다. 손이 얼얼하다. 한데 객잔 밖 계곡으로 날아 가버린 그 검이 다시 되돌아오고 있다?

지존보의 힘이 아니었다.

다시 되돌아오는 검을 노려보는 지존보의 두 눈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객잔 바닥 어디에선가, 또는 누군가가 검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검뿐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콰각!

돌아온 검이 지존보와 남궁패의 사이에 수직으로 박혔다.

박힌 검이 부르르 떠는 그 때 남궁휘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출렁-!

“어? 어어!”

바닥이 출렁거렸다.

내공이 강한 자들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남궁휘를 비롯한 모추용과 진천 그리고 4인방도 그 출렁거림에 균형을 잃었다.

“으헥?”

술 취한 사람처럼 균형을 잃은 남궁휘의 몸이 옥란이 서 있던 주방 입구 쪽으로 고꾸라졌다. 그곳은 아까부터 지존보가 주시하던 진동의 중심이었다.

옥란이라는 여인도 바닥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똑바로 서있는데, 더 놀라운 건 옥란의 손을 붙잡고 아무렇지도 않게 잘만 서있는 설아였다.

“?”

설아가 웃네?

바닥의 힘이 강해져왔다. 더 큰 힘으로 빨아들인다. 지존보가 바닥을 내려다보는 그 때였다.

우드득, 콰앙!

낡은 객잔의 목재 바닥이 비명을 지르며 내려앉았다.

남궁휘의 비명과 함께 바닥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그 안에서 시뻘건 마기(魔氣)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라와 남궁휘를 사로잡았다.

“휘야!”

남궁평이 놀라 신형을 날렸다.

조카의 손을 붙잡았지만 같이 빨려 들어가니 그 손을 다시 놓아버렸다.

“숙부!”

남궁휘의 얼굴이 애처롭다. 마기는 괴물처럼 남궁휘를 집어 삼키더니 깊은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가 버렸다.

“혈마(血魔)의 관!”

개방의 방주 모추용이 천장의 대들보에 매달린 채로 소리쳤다. 모추용의 두 눈은 바닥 한 가운데 생긴 시커먼 심해와도 같은 지하를 내려다본다.

살수들도 몸을 날려 천장에 매달려 있고, 진천과 4인방은 난간에서 각자 기둥을 꽉 붙잡고 벌벌 떨고 있다.

“엉뚱한 놈이 들어가 버렸네?”

옥란의 목소리가 바뀌어 있었다.

조금 전의 상냥함은 온데간데없고 얼음처럼 차갑고 교활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설아를 뒤로 밀쳐내며 품속에서 마교의 성물 혈옥령(血玉令)을 꺼내 들었다.

“지존보. 낙화객잔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객잔 마당에 뿌려져 있던 붉은 꽃잎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꽃잎이 아니었다.

사람의 피를 먹고 자라는 식인충(食人蟲) 적린접(赤鱗蝶)들이었다.

지존보는 퀭한 눈으로 거대한 구멍 속을 내려다보았다.

남궁휘의 비명이 그쳤다.

쿵쿵쿵.

기괴한 심장박동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남궁세가의 멍청한 공자가 잠자고 있던 마교 최악의 금기 흡혈마공의 제물이 된 것이다.

지존보는 자청보검을 고쳐 쥐었다.

이제는 잠자리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피똥은 내가 싸겠네.”

건조한 그의 한마디가 광기에 휩싸인 객잔에 낮게 깔렸다.

지존보가 훌쩍 뛰어내렸다.

그 심연과도 같은 지하 깊은 곳, 혈마의 관으로.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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