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인사
그 남자의 일상
확장하지 않은 구형아파트 베란다.
빨래 건조대에는 난닝구로 통하는 누런 러닝셔츠 세벌과 함께 네모난 블루투스스피커가 걸려 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80년대 유행했던 노래를 아이돌이 리메이크해 음반차트 1위를 6개월씩이나 차지하고 있는 발라드 곡이다.
캠핑용 의자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는 남자. 음악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2시죠? 약속의 시간.”
남자가 끙 하며 몸을 일으킨다. 층간소음을 의식했는지 발자국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냉장고 열리는 소리. 남자가 캔 맥주 하나와 먹다 남은 소주병을 가져와 준비된 유리잔에 섞는다.
“자, 기다려보세요. 이제 곧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겁니다. 어.... 어? 가죠? 잠깐만.... 잠깐만.... 갑니다, 가. 간다.... 간다.... 친다.... 친다.... 오우! 예! 봐요! 내 말이 맞죠? 이게 바로 주식입니다!”
남자가 벌떡 일어나 춤을 춘다. 모니터 화면 속 주식의 주가는 천장이라도 뚫을 기세로 치솟아 오른다.
남자가 핸드폰을 만지자 음악소리가 끊긴다.
“이거 아무나 못하는 겁니다. 자 봅시다. 방금 수익이 7천 5백 원. 담배 값은 나온 거죠. 처음엔 혼자 한 게 아니었어요. 동네 어벤져스라고 네 명이서 펀드모임을 만들어 각 50만원 씩 돈을 모아 했는데, 그 친구들 내 말을 죽어라 안 듣는 겁니다. 그 친구들이요? 모르겠네…. 아마 지금 다 그만뒀을 겁니다.”
남자가 소맥을 또 만다.
“그럴 수밖에요. 자신감도 없고 노력도 안하는 친구들이었으니까. 말은 또 더럽게 많아요. 이 주식하는 사람들 보면 잃은 돈은 절대로 말 안 해요. 딴 것만 말하지. 그 친구들이 딱 그런 부류죠. 저요? 저는 완전 다르죠. 차트를 읽거든요. 정확하게는 차트에 담긴 세력을 읽는 거죠. 거기에 제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와 내가 선택한 것에 실망하지 않을 용기.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주식은 돈을 잃을 수가 없는데 그 친구들은 아니었던 거죠. 잠깐만요... 한 잔 더 마셔야겠습니다.”
남자가 소맥을 한 모금에 마시지 않고 홀짝홀짝 아껴 마신다.
“왜요? 그렇게 잘하면 왜 푼돈에 가까운 소액으로 주식을 하고 있느냐 이거죠? 방금 보니까 천 만 원만 넣어뒀어도 수익이 굉장했을 텐데. 지금 그거 묻고 싶은 거죠?”
남자가 남은 술을 전부 다 털어 넣는다.
“다 해봤죠. 단 5분 만에 천만 원을 투자해 3백을 벌었었죠. 돈 벌기 참 쉽습니다. 쉬워요, 쉬워. 정말 쉽습니다. 세상이 온통 아름다워 보이고, 마누라 퇴근시간이 기다려진 건 그 때가 아마 결혼하고 처음이었을 겁니다.”
남자가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일으켜 냉장고로 향한다. 층간소음을 일부러 내는 것처럼 발자국 소리가 크다.
맥주 한 캔을 가져와 소맥을 섞는 동작이 매우 자연스럽다.
누런 러닝셔츠는 닳고 닳아 목이 늘어날 대로 늘어나 있고 남자의 얼굴.
덥수룩한 수염에 도대체 며칠을 감지 않은 머리인지 기름이 줄줄 흐르는 게 폐인에 가깝다.
쿵쿵쿵.
“이 개 같은 년이!”
남자의 발자국소리에 아래층에서 응답이라도 보내오는 듯 바닥이 울리자 남자가 욕을 내뱉었다.
“후! 참자, 참아. 곧 이사 갈 거니까. 잠깐만, 근데 어디까지 얘기 했죠?”
남자가 핸드폰을 만진다. 음악이 다시 흘러나온다.
“아, 우리 마누라. 잠깐 우리 마누라 얘기를 좀 하자면 시장에서 흥정에 또 흥정해서 물건을 단 돈 십 원이라도 아껴 사고 10킬로를 걸어와 집에 왔는데 5백 원 거스름돈을 못 받았네? 이 여자 다시 걸어갑니다. 기어코 또 실랑이해서 5백 원을 받아오는 여자죠. 그 때 저요? 저는 그 때 경마로 2천 날리고 술에 잔뜩 취했는데 대리가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기에 그냥 차를 몰고 집에 왔죠. 그 날이 맞을 겁니다. 5백 원 받아왔다고 좋아하면서 얘기 하더라고요. 다음 날 차를 어디에 뒀나 기억이 안나 아파트 한 바퀴 뱅뱅 돌아 찾았는데 주차를 기가 막히게 했더라고요. 네? 아니, 2천원 말고 2천 만 원이요. 경마 안 해보셨어요? 아무튼 그 날 5분 만에 돈 3백 번거 집사람 밥 차려 주고 기분 좋아 술 한 잔하고 저녁에 미국주식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다 날렸죠. 아니지? 3백에 백만 원 더 날렸었지? 주식이 그런 겁니다.”
남자가 전자담배를 입에 문다.
“이거 냄새 안나요.”
잠시 후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민원이 들어와 전자담배라도 실내흡연을 금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아이, 진짜 개 같은 년. 이게 무슨 냄새가 난다고.”
남자가 핸드폰을 만져 음악소리를 키웠다. 곡도 바꾸었다. 신나는 댄스곡이다.
“지금 잔고요? 뭐 공개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사실 가진 돈 다 잃고 4천 은행에서 당겼죠. 그 돈이요? 그 돈도 다 날렸죠. 지금 당장 담배 값도 없을 정도니 사람 미치는 거죠. 울 집사람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이거 알면 난 죽는 거죠.”
쿵쿵쿵.
음악소리 때문이다. 밑에서 또 소음이 들려왔다.
“근데 왜 이걸 계속 하고 있느냐? 중독 아닐까요? 손가락 자르기 전에는 못 끊는 거죠.”
남자가 볼륨을 더 높인다.
잠시 후 현관문이 쾅쾅쾅 거린다.
아래층에서 쫒아온 것이다.
남자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지른다.
“이봐,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지? 내가 한심해? 왜 이렇게 사냐고? 왜? 난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판사 변호사들은 주식 안 해? 의사들은 주식하면 돈 안 잃어? 내가 잘 됐으면 좋겠다고? 내가 왜 당신네들 마음에 맞게 잘 살아야 하는 거지? 내가 특권층이 아닌 이상 잘 못사는 게 맞는 거 아니야? 봐! 저기 밖을 보라고! 줄 하나에 대롱대롱 생명 매달고 유리창 청소하는 저 청소부! 제초 작업하는 조경사! 쓰레기차가 들어오네. 저 환경미화원! 저 사람들은 주식 안 할 거 같아? 아주 작은 거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혹시 모를 이변을 기대하고 살면 안 되는 거야? 우린 그러면 안 되는 거냐고!”
쾅쾅쾅! 쾅쾅쾅!
여보세요! 음악 안 끌 거면 잠깐 나와 보세요!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현관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남자가 노트북을 들어 벽에 던져버린다. 자판이 몇개 튀어나오고 바닥에 떨어진 노트북은 그런대로 멀쩡해 보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남자. 흐느낌이 오래간다. 남자가 핸드폰을 만져 음악을 끄자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도 멈췄다.
“죄송합니다.... 이런 꼴 보여드리려고 모신 게 아닌데요... 저 잠을 못잔지 30일 째입니다. 누적된 무단결근으로 직장은 잘렸고, 은행 빚 이자를 갚기 위해 제2금융권에서 또 다른 대출을 만들고 또 여유 돈이 남으면 주식을 해서 날리고.... 이젠 사채까지 끌어 쓰고 있네요. 방금 7천 5백 원 수익 낸 돈이 남은 사채 빚 전부입니다. 이젠 저도 지쳤습니다. 말해야죠. 아내에게 다 말하고 용서를 구해야죠. 그게 아니면 마포대교로 가든지요.”
남자가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건다.
액정화면에 표시된 이름은 오직 내편.
“여보. 오늘 내가 당신한테 말할 게 있어. 지금? 지금은 그렇고. 꼭 당신 얼굴 보고 말하고 싶어. 밥? 밥 안 먹었지. 알았어. 밥 먹을 게. 그래, 이따 봐. 고생하고.”
남자가 전화를 끊고는 한숨을 푹 내쉰다. 오랜 시간 침묵이 이어진다.
장고의 장고를 거듭한 남자가 결단을 내리고 말한다.
“제가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남자가 누런 러닝셔츠를 벗었다.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안방으로 이동해 장롱 문을 열어 결혼식 때 입었던 양복을 꺼내 입는 남자.
면도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말끔하다. 꽤 준수한 편이다.
“그럼,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남자가 구두를 신고 현관문을 열고는 세상 밖으로 나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