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시, 사랑

장르시장과 문학의 경계에서

by 임경주



시장은 가장 얕고 넓은 욕망에 반응할 때 돈이 몰려든다고 한다.

장르시장이 그렇다고 본다.


문학은 시장을 말하면 뭔가 상스럽다.

애초에 이 세계는 시장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도대체 이 세계는 뭘 하는 곳일까?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또 뭘까?

여기도 사람 사는 곳 아닌가?

언어를 실험하고 시도하고 극한에서 새로운 어휘와 문장을 발견하는 곳?

그래.

새로운 대륙을 찾아낸 위대한 탐험가와 발견가처럼 똑같은 어휘와 다 쓰는 문장으로도 글이 가진 진정한 힘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목도하고 사유를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좋다.

다 좋다.

이거 아무나 못해. 인정해. 그래서 차지한 당신들의 권위가 영원할까?

돈 주고 사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고 파는 사람도 없다면 이 바닥은 도대체 뭘 어떻게 먹고살자는 걸까?

그것은 차리리 독백이다.

독백을 예술의 정수라 치부하면 문학은 사회적 영향력을 잃고 박제된 유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대들의 폐쇄된 회로일 뿐이다.


가난한 시인은 쌍 8년도 직장인들 야근처럼 미덕인가?

돈 안 벌어도 좋으니 이 험한 세상에 그럴 싸한 처방전 하나 내놓으면 아름답고 가난이 극복되나?

순문학 권위를 가진 자들은 응답하라.

우리 작가들 최소한 먹고는 살아야 되는 거 아닌가요?

문학은 배고파야 제 맛?

이 낡고 낡은 낭만주의로 인해 위대해지고도 남을 작가들이 스스로 그들의 삶을 갉아먹고 무명으로 사라졌다.

그대들은 잘 알잖아?

예술은 결국 삶 위에 있다.

자아를 갉아먹고 탄생한 글이 독자의 삶을 풍요롭게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너희들의 글쓰기는 그냥 취미라는 건가?

그만. 너는 여기까지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다.

이건 장르문하생들도 똑같다.

더 이상 오르지 못하는 슬픔은 장르나 순문학이나 마찬가지다.

어느 쪽이든 성장판은 이미 닫혀 있다.

그래서 뜻이 있다면 죽기 살기로 해야 한다.


어떤 기관이든 연구단체든 국가지원을 받는다.

그런데 왜? 예술가들은 어떤 사회적 지원도 못 받고 홀로 외롭고 고독하게 가난과 싸워가며 창작해야 하는 걸까?

악을 감화시키는 글은 그 어떤 바이러스백신보다 효과가 높다.


혹자는 장르소설이 문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건 문학이 아니라 디지털 껌이라나?

그래 인정한다. 장르는 문학이 아니다.

인스턴트다.

하지만 이 인스턴트는 독자의 욕망을 정확히 타격한다.

성공과 실패는 돈이다.

우리가 대중의 허기를 어떻게 채워나가고 있는지 그대들은 보지도 않고, 또 보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겠지.


근데, 인스딴또도 요즘은 생물, 친환경 저리 가라다.

친환경보다 몸에 좋은 상품들이 도처에 널리고

세상은 바뀌고 또 바뀌어 나간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세상변화에 가장 둔감한 자들이 기득권 그 언저리에 위치한 자들인데,

내가 보기엔 그게 당신들 같다는 말이지.

이제 그만 권위를 내려놓으라.

진정한 권위는 그리 뭐 대단한 게 아니다. 가풍이다. 한 집안에 흐르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일 뿐이다.


글쓰기는 홀로 고립된 채로 끊임없는 실험과 시도, 극한의 사유 이전에 치열한 생존이 우선이다.

사람이 산다는 건, 살아간다는 건.

서로 만나야 하는 것이다. 소통해야 한다. 나누어야 한다.

좋은 글은 거기에서부터 나온다고 본다.


극한의 시,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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