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IMF 경제 위기 무렵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원치 않는 희망퇴직을 하게 됐을 때, 가족들은 틀림없이 어딘가 아프실지 모른다 했었다. 일요일도 쉬는 날도 없이 35년을 일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퇴직 후 아빠는 가족들의 우려와는 달리 좋은 카메라를 사 달라하시더니 매일 복지관을 다니시며 사진 찍는 법과 포토샵을 배우셨다. 그리고 숲 해설사라는 낯선 직함을 우리에게 내미시며 은퇴 이후 주도적인 삶을 사셨다.
그 시절 나는 대학을 다니면서 자취 생활을 하고 있었고 안부 전화를 걸었을 때 아빠는 “어. 어. 왜? 엄마 바꿔줄게”대화는 이 정도가 전부일 정도로 무뚝뚝하셨다. 정답지 않은 아빠가 내게 메일을 보내실 때는 있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포토샵을 이용해 만든 메일이었다. 클릭하자마자 노인회관 한쪽에 아무렇게나 자리 잡은, 무식하게 커다란 노래방 기계에서나 나올 법한 관악기 소리가 볼륨은 아랑곳 않고 눈치 없이 크게 울려 퍼진다. 이윽고 부랴부랴 음량을 줄이고 나면 순정만화 주인공의 커다란 눈동자에서 본 적이 있는 듯한 반짝이는 펄이 흩날린다. 동시에 글은 한 줄을 끝까지 채 읽기도 전에 사라지는 그 당시 유행했던 멜로디 편지 말이다. 글쓰기 과제로 다시 읽게 된 피천득 님의 수필 문체를 보니 아빠의 시인 듯 편지인 듯했던 그 메일이 퍽 그리웠다. 미리 저장해 두지 않아서 지금은 읽어볼 수가 없다는 게 한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아빠와 메일을 주고받을 정도로 다정한 사이도 아니었고, 크게 내용도 있는 글도 아니었던 걸 보면 아빠는 그저 허망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막연하지만 그리움의 대상이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아빠는 좋아하시는 술만 드시면 빈손으로 들어오시는 법이 없었다. 하나에 50원씩 하는 하드를 만원 어치, 전병 과자 과자와 붕어빵 5천 원어치를 주렁주렁 양손에 달고 오셨다. 그런 아빠를 보며 동네 이발소 아저씨가 뭘 그렇게 창피하게 들고 다니냐며 약을 올리자, 욱했던 아빠는 그 많은 간식거리를 집으로 가져오지 못하고 그 집에 퍼 들려주곤 했단다. 풀풀 술 냄새를 풍기시며 알 수 없는 자작곡을 신나게 부르시고, 했던 얘기를 반복하시는 건 너무 싫었으나 언제나 아쉬운 건 내 쪽이듯 나는 그 간식거리를 기다리곤 했었다. 낯간지러워 자식에게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은 술 앞에서만은 무장해제가 되는 모양이다. 아빠 출근길에 백 원만, 백 원만을 입에 달고 살았을 때도 무뚝뚝하게 손에 쥐어주셨던 것과는 달리, 술에 취하시면 뽀뽀를 해줘야만 줄 수 있다고 하셨을 때 나는 백 원에 영혼을 함께 내놓곤 했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가족과 친척들로부터 듣는 생전의 아빠 이야기는 퍽 낯설었다. 사촌, 육촌은 물론이거니와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친척들과 이웃의 조사(弔事)가 있을 때마다 3일장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키며 유가족들이 챙기기 어려운 것들을 돌봐 주셨던 건 언제나 아빠셨다고 한다. 그렇게 기억을 떠올려보니 아빠가 쉬시는 날은 누군가의 장례가 있던 날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은 황금연휴가 시작되는 첫날의 토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문객이 참으로 많았다. 마치 이곳으로 휴가를 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조문객은 대관령을 넘고 또 넘어왔다.
이제 곧 아빠의 7번째 기일이 다가오고 있고, 올해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셨던 연세가 되셨다. 가족과 다정한 말 한마디 나눌 줄 모르시던 아빠를 나도 오랜 직장생활을 하며 그의 고된 삶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 바로 바꿔주지 말고 먼저 아빠와 무슨 얘기 나눌지 생각하고 싶은데, 지금 곁에 없는 아빠가 야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