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전에 시나리오 수업을 인터넷으로 들은 적이 있다. 완전 기초반이었고 수업료도 비싸지 않았다. 그때 분석했던 시나리오가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였다.
그 영화에 한석규가 친구한테 걸려온 전화를 짧게 끊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의 의미는 한석규는 죽을병에 걸렸는데,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친구한테 아무리 말해봤자 방법이 있나. 그래서 전화를 짧게 끊는 거라고 선생님이 해석해 주신 게 아직도 기억난다.
한석규는 심은하하고 귤을 한 개씩 나눠먹고 싶어서 리어카에서 귤 두 개를 사 오는데 심은하가 다시 가서 귤을 한 봉지 사 오는 장면이 있다.
이 비슷한 장면이 전도연(부정)과 류준열(강재)이 나오는 드라마 <인간실격>에 나온다. 부정이 강재에게 귤을 나눠주니까 강재가 묻는다. 가방에 귤이 몇 개 있냐고. 허진호 감독, 김지혜 작가의 드라마다.
나는 드라마를 많이 봐서 진짜 어지간한 드라마에 감동받고 그런 스타일이 아니다. 보통 드라마에 웃긴 장면, 감동적인 장면이 나오면 그 장면의 목표가 있고, 그게 느껴지는데 이 드라마는 웃긴 장면이 나와도 그게 끝이 아닌 것 같고, 내가 못 읽어낸 다른 의미를 놓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드라마를 2번 연속해서 보고 대본집을 사서 봤다.
강재가 부정에게 하는 말. 우리 다음에 만나면 같이 죽을래요? 처음에 봤을 때는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몰랐는데 다시 보니 혼자 죽지 말라는 뜻이었다.
사람들이 인생드라마라고 <나의 아저씨>를 많이 좋아하던데 나도 그 드라마가 좋지만 나하고 다른 점이 있는데 그 드라마에는 사회성이 있었다. 사주를 공부하는 친구가 그게 바로 관성이라고 했다.
내 사주에는 관성이 없어서 나하고 다르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극 중 이선균이 지안 할머니 장례식을 크게 치러주는데 감동적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감동은 아니었다.
나는 <인간실격>을 보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고,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생명의 은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