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싫어하는 것들을 자주 마주치게 되는 때가 있다. 이번 한 주가 그랬다. 마치 우주가 일부러 내가 피하고 싶은 것들만 골라서 던져주는 것 같았다. 맥락도 없이 넘어오는 일들, 존경했던 사람이 내가 가장 혐오하는 행동을 하는 순간, 그와 나의 마음이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들.
그런 순간마다 나는 움츠러들었다. 어깨가 굳어지고, 턱이 경직되고, 숨이 얕아졌다. 몸이 먼저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나에게’라는 푸념이 맴돌았다.
싫어한다는 것은 참 이상한 감정이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유를 설명하기 쉽지만,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한 이유를 찾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냥 본능적으로, 세포 하나하나가 거부하는 느낌. 마치 몸이 기억하고 있는 어떤 상처나 두려움이 경보를 울리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싫어하는 것들이 계속 나타날 때면 나는 그것들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피하려고 할수록 더 선명해지고, 잊으려고 할수록 더 생생해진다. 마치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나를 정의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다 문득 불교에서 말하는 아집이 떠올랐다. 자아에 대한 집착이 고통의 근원이라는, 그 개념 말이다. 자기 자신을 너무 실체적인 것으로 여기며 집착할 때 생기는 욕망과 분노, 질투가 괴로움을 만든다고 한다.
어쩌면 내가 경험한 그 ‘싫어하는 순간들’도 일종의 아집은 아니었을까.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 대한 고정관념. 그 틀 안에서 세상을 재단하려고 하니까, 그 틀에 맞지 않는 것들이 나타날 때마다 불편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보니 누군가를 싫어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방이 내 기대와 다르게 행동할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과 다를 때 느끼는 그 불쾌함. 그것이 과연 상대방의 문제일까, 아니면 나의 경직된 시선의 문제일까.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싫어하는 것이 있다는 건 나만의 기준과 취향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않을까.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에 무덤덤하다면, 그게 과연 건강한 마음일까. 선호와 거부감, 끌림과 밀어냄이 있어야 비로소 살아있는 감정이 아닐까.
결국 문제는 싫어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나의 태도인 것 같다. 싫어하는 것을 마주쳤을 때 그것을 밀어내려고만 하지 말고, 잠시 멈춰서서 왜 이것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지 들여다보는 것. 그 불편함 너머에 있는 나의 상처나 두려움, 혹은 고집을 만나보는 것.
자아에 대한 지나친 고민들이 시야를 가리고, 나를 어딘가에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번 주 내내 그런 생각이 맴돌았다. 싫어하는 것들이 계속 나타나는 건 어쩌면 우주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너는 정말 누구인가, 너는 정말 무엇을 원하는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