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회사이 Oct 28. 2021

빈 마음에 깃드는 평화

노는(遊)신부의 수상수런수다(4)

photo by noneunshinboo


빈 무대가 있는 풍경 (2)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편에 나오는 말이다.

“제 삶을 죽이는 자는 살고(殺生者不死) , 제 삶을 살리는 자는 죽습니다(生生者不生). 그가 세상 일을 처리하는데 모든 것을 떠나보내고 모든 것을 맞아들이며,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것을 이룩하니, 이를 일컬어, <혼란을 거친 평화(攖寧)>라고 합니다. 혼란을 거친 평화란, 혼란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攖而後成).” (<정호경 신부의 장자 읽기> p. 181)


성인이란 자기의 삶을 죽이고, 기꺼이 모든 것을 떠나보내고 또한 맞아들이고, 지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놓아버리고 무너뜨리며, 그럼으로 모든 것을 이룸없이 이루어가는 사람이며, 얽힘과 소란과 혼란을 두려워함없이 피함없이, 그리고 얽매임없이 자유하는 사람이며, 자기를 비우고 죽인 사람이고, 얽힘과 소란 가운데 피어나는 평화, 혼란을 거친 뒤에 찾아오는 평화, 모든 변화를 겪은 뒤에 찾아오는 평화를 제 것으로 누리는 사람이라고 장자는 말한다. 


평화의 길이라 여기며 그 혼란을 걷는 성인은 아프다. 혼란과 분열, 그리고 아픔은 평화를 향한 피할 수 없는 길이다. 그러나 성인은 나를 무너뜨리고 나를 버리고 나를 떠나고 나를 죽이는 아픔의 길을 택하고 걷고 또 걷는다. 아파서 걷고 아파도 걷고 아픔을 안고 걷는 사람이다. 몰라서 걷고, 모르고 걷고, 모르는 듯 걷고, 또 알고 걷고, 알고도 걷는다. 누구나 아는 아픔의 길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걷는, 아픔의 길을 아픔 너머로의 길로 여겨 걷는 사람이다. 걸을 수록 옅아지는 아픔이 아니다. 길을 가며 쌓이고 쌓이는 깊어지고 짙아지는 아픔들, 그러나 그 훨씬 너머를 짙고 깊게 응시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길 가의 사람들에겐 알 듯 모를 듯한, 그래서 경계 밖으로 건너가는 사람, 경계 밖의 사람이다. 성인은 혼란을 거친 뒤, 마침내의 평화를 누린다. 


장자가 말하는 평화의 길을 가는 사람은 혼란과 혼돈을 지나며 달라져간다. 그 길을 걷는 나, 달라져가는 나를 낯설고 다르게 보는 남들의 시선들에 크게 놀람이 없다. 불편해하지도 않는다. 평화의 나는 길 끝에 도달해 ‘내가 이루어 낼 나’가 아니다. 길 위에 서고 걸으며 ‘되어지는 나’이다. 지금 그 고단한 길을 걷는 지금의 나는 걷고 걷다 되어질 그 나, 혼란을 거친 뒤의 그 나를 모르고 알 수도 없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으니 평온하고 고요하다. 그것은 선물처럼 되는 나이다.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평화가 아닌 칼을 주고 불을 지르러 왔다 (마태복음서 10:34-39; 누가복음서 12:49-53).” 


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평화의 사람이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인 것은 아니다. 그가 가는 낯선 길, 그 길 위가 아닌 그 길 가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그는 혼란을 주는 사람, 불편한 사람일 뿐이다. 뒷산 산책로에 떨어진 삐라처럼 불온하고 수상쩍다. 저들이 보기엔 그 삐라에는 특별한 것이라곤 없다. 단지 평온하고 별 일 없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산책로에 떨어졌다는 이유 말고는. 그래서 그들에겐 더욱 불온하고 불편하다. 그러나 불온하고 불편해진 산책로는 누구 탓인가? 소란스러워지는 일상은 누구 때문인가? 질문 자체가 벌써 불온하고 불편하다. 


그렇다면 성인이 누리는 평화는 무엇일까? 그건 아무 것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 나를 속 시끄럽게 하지 않고, 나를 불편하게 하지도 않는 평화. 가만 가만 하고 조용 조용한 한여름 매미 우는 소리만 배경 음악처럼 들리는 고만고만한 잡목들 사이, 제법 큰 나무 아래 그늘 안쪽 평상 위의 일상을 깰까 조심스럽고 조심스러운 그런 고요의 평화는 아닐 것이다. 여기까지 이어져 온 길, 지금까지의 고만고만한 일상과 다름이 없고, 큰 별 일 없고 큰 탈 없는, 그럭저럭의 평온하고 평탄한 산책로 같은 하루가 이어지는 무탈함의 평화도 아닐 것이다. 내가 알든 모르든 여기 이들은 사실 나의 관심 밖이고, 거기에 있는 저들 역시 마찬가지, 오직 여기 있는 나와 내가 포함된 우리, 그 나와 그 우리의 순조로움과 평온함을 보장하는 평화도 아닐 것이다. 나와 그 우리의 삶을 사는데 지장이 없는 평화, 나와 그 우리의 세상을 누리고 즐기는 평화, 제 소견대로 사는 평화, 그런 속 좁은 평화는 아닐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을 찾을 것이다” (마 16:24-25). 


예수를 따른다, 제 십자가를 진다, 자기를 부인한다, 자기 목숨을 버린다, 자기 소유를 버린다, 이 모든 것들은 당연히 아픔과 혼란과 분열을 동반할 것이다. 평화를 향한 길에서 만나는 피할 수 없는 것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 제자의 길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라 하신다. 그리고 그 길은 자기를 비우는 길이라 하신다. 버리고 비워져 나는 작아지고 그 만큼의 나의 속은 넓어지고, 나 보다 작거나 크거나의 비교가 없는, 나 그리고 우리와는 무척이나 다른 사람들 또한 넉넉히 안을 수 있는 속 넉넉해진, 나와 우리 모두가 바라고 소망하고 그래서 찾아오는 평화일 것이다. 나를 버리고 비우고 죽이는 아픔들을 피함없이 걷고 겪고 거친 뒤에 찾아오는 평화일 것이다. 내가 찾고, 만들고, 빼앗고, 쟁취하는 평화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리고 그 분의 평화는 우리를 찾아오고 주어지는 것이다. ‘로마’가 주는 칼의 제국의 평화와는 다른 평화다. 그래서 그 평화는 뜻밖의 선물, 은총이 된다.  


photo by noneunshinboo


나는 오늘도 어제처럼 나의 하루와 모르는 이들의 고단한 하루를 쓸고 닦고 비우고 버린다. 마음을 비우고 무대를 비우는 일도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면 좋을 텐데, 그런 허튼 생각을 한다. 이 글도 허튼 짓이겠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짓이 공부고 수업(修業)이고 연습이고, 또한 나를 사랑하고, 나를 평화로 이끄는 하나의 길이겠지, 한다. 하지만 여전히 내게는 참 먼 길이겠다, 싶다. 


오늘 밴쿠버의 빈 무대에 비가 와 머물고, 조금 빈 나의 마음에 아주 조금 평화가 찾아온 듯하다. 


작가의 이전글 빈 마음에 빛이 머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