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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Oct 28. 2021

더 드라마, 그 시작은 있고
그 끝은 아직 없는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죽고 사는 길 걷는 예수(1)

photo by noneunshinboo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1)


제 1막,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창세기 1:1)이 끝났다. 그리고 여기 제 2막,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 

‘내가 이제 정말 놀랍고 기쁜 소식을 전할께’, 급히 주위의 사람들를 불러 모으고 난 후,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 이야기꾼 마가는 이 짧은 첫 문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서둘러 시작된 이야기의 그 시작은 짐 보따리 내려놓듯 그렇게 ‘툭’, 불꺼진 영화관 스크린에 느닷없이 등장한 영화의 타이틀처럼 ‘스윽’, 아주 간결하다. 

너무 서두르는건 아닌지, 무심한건 아닌지 싶을 정도로 그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이름으로 이루어진 타이틀 뿐. 지금은 그걸로 족하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그 끝은? 성질 급한 이는 이야기의 끝이 벌써 궁금하다. 그리고는 아예 들고 있던 책을 빼앗아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들춘다. 


“그들은 뛰쳐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 (**마가복음 16:8) 


그런데, 이건 이야기의 끝이 없다. 끝이 나지 않았다. 이야기의 결말이 없다. 흔히 말하는 열린 결말이 아니라, 그냥 이야기의 끝이 없다. 서둘러 급하게 시작된 이야기는 또 그렇게 서둘러 급하게 마무리된다. 이야기를 하다 말고 도망치 듯, 아님 누구를 급하게 쫒아가는 듯 뛰쳐나간 이야기꾼. 마치 누가 잡으러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것처럼, 짐을 꾸릴 사이도 없이 대충 필요한 것만 챙겨 급하게 그리고 거칠게 떠났다.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따라오라는 건지, 따라오지 말라는 건지 코 앞에서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그렇게 가버렸다. 마치 나 홀로 모두 떠난 빈 방에 남아있는 것처럼 급히 중단된 이야기에 나 홀로 남겨졌다. 


저기 멀리 더는 아무 말도 안 하겠다는 듯,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듯, 그렇게 이야기를 중단하고는 마가는 제 길로 떠났다. 알아서 따라오라는 것일까? 읽고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끝을 마무리 지으라는 듯, 너무 급작스럽고 도발적인 이야기의 마무리다. 시작은 되었으나 아직 끝이 나지 않은 이야기라니. 한참 재미있게 보다 만 결말없이 종영된 드라마라니. 그러나 이것이 바로 마가가 지금 전하는 복음이다. 그리고 그때 거기 그렇게 급하게 시작된 – 그러나 이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던 – 복음은 줄곧 끝이 없이 계속되어 지금 여기 우리에게 왔고, 우리는 지금 그 복음을 듣고 읽고 또 그 끝이 나지 않은 이야기를 걷고 살며 함께 그 끝으로 향한다. 




그렇다면 복음의 ‘시작’은 단지 ‘시작’에 불과한 것인가? 

예수에 관한 복음, 즉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복음이다. 그리고 그 예수가 전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예수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그 기쁜 소식은 또한 예수를 전하고, 그리고 예수가 바로 그 기쁜 소식이다. 마가는 이 짧은 첫 문장으로 그 모든 비밀을 암호처럼 말한다. 이제 그 비밀이 풀려갈 것이다. 그 암호의 해독은 시작되었다. 그 감추어진 그러나 이제 드러나느 그 비밀은 그래서 또한 복음이다. 그 복음은 선지자 이사야가 전한 예언(2-3절)과 함께 ‘시작’되었고,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등장과 그의 회개의 세례(4-8절)에서 그 ‘시작’은 이어져, 요단 강의 예수의 세례와 광야의 시험(9-13절)에서 ‘누구’가 그리고 ‘무엇’이 복음인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여,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14-15절)에서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며, 그리고 마가가 앞으로 전할 예수의 가르침과 선포와 치유를 비롯한 그의 행적, 그리고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세상에 온전히 드러날 것이다. 


photo by noneunshinboo


그리고 그때 거기 그렇게 시작된 그 복음은 아직 끝이 나지 않은 채로 지금 여기 우리에게로 왔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는 그 복음의 시작이 아닌 끝을 사는가? 끝을 향한 길 위에 서 있는가, 아님 그 길을 걷는가? 아니면 여전히 나에게는 계속 반복되는 시작, 그 시작점에서 선 채 머뭇거리는가, 제자리에서 뱅뱅 돌기만 하는가? 그 끝나지 않은 복음은 우리에게 건네진 끝을 맺어야 할, 끝내야 할 골치 아픈 숙제인가? 아니면 ‘봐 이게 내가 알고, 내가 걸어온, 그리고 내가 살아낸 복음의 끝이야’ 라며 내놓는 숙제 아닌 그 다른 무엇인가? 그것도 아니면 ‘나는 싫어, 난 믿기만 할래. 나 말고 누가 그 끝을 내줘, 그 결말을 보여줘, 난 그냥 여기 있을래, 조용히 보기만 할래’ 하는 그저 남 얘기이고 예능 프로그램식에서 보는 나만 빼고의 일종의 폭탄 돌리기인가? 


16장 8절의 그 끝이 나지 않은, 아니 그 끝을 말하지 않은 마가복음서는 계속해서 1장 1절의 시작만 있는 복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내가 그 복음을 직접 살지 않는 한 적어도 나에게 16장 8절 이후의 부활하신 예수는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저 빈 무덤은 나에겐 그저 두렵고 무섭기만 할 뿐,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하고 나에게로 건네진 그 심지가 아직 살아있는 폭탄일 뿐이다. 

길을 걷기도 전에 벌써 마가의 짧은 첫 줄이 우리를 고민스럽게 만든다. 불편함이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누가복음 5:8)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마태복음 10:34)


Peace in Chirst  


*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로 번역이 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주어이면서 목적어이다.

** 권위를 인정받는 대다수의 고대의 성경 사본들에서 마가복음서는 8절에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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