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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Oct 28. 2021

족보에 내 이름 올리기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길 위에서 길 가르치는 예수(1)

photo by noneunshinboo


예수의 길 떠나는 가족*을 시작하며 . . . 


하얀 메밀꽃 필 무렵의 봉평으로, 김약국의 딸들이 살았다던 통영으로, 불국사의 종소리가 정말 들릴까 싶은 신라의 달밤이 있는 경주로, 의자왕과 삼천명이나 될까 싶은 여인들의 한이 있는 백마강의 부여로, 그리고 여전히 떠나고 싶은 푸르고 푸른 밤의 제주도를 언젠가 아들과 함께 크게 한 바퀴 돌고 싶다. 어떤 흙에 씨가 뿌려졌고 어떤 물과 볕에 뿌리가 내렸고, 그 맞은 비와 바람은 얼마나 거셌고 그 눈은 또 얼마나 차가웠는지, 그럼에도 터 오른 싹의 그 모양새는 어떠했고, 그 잎사귀 얼마나 보드라웠는지, 그 열매는 또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조금은 나 아는 대로 아들에게 알려주고 보여주고 싶다. 얼마나 긴 시간, 긴 기다림, 그 오랜 역사의 온갖 작용과 들썩거림 속에서 네가 마침내 엄마와 아빠에게, 그리고 세상에 나왔는지를, 네가 여기 함께 있을 수 있게 했던 그 수많은 고리들과 관계들과 사건들을 알려주고 싶다. 순간은 영원 속에 있음을, 그리고 그 영원은 여기 순간 속에 빛을 내고 있음을.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 . . 누가 누구를 낳고, 그 누구는 또 누구를 낳고, 그 누구는 또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 또 낳고, . . . 그리고 마침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마태복음 1:1-17, 그리고 참조, 누가복음 3:23-38) 


마태가 전하는 이 족보는 나 상놈 아니고 양반이다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 이런 으리으리한 가문의 이러 이러한 사람이오 허세를 위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우리가 알지 못할 오랜 시간 전 부터 시작되어 오늘 여기로 이어지는 그 긴 고리들, 연속되는 우연이 아니 오래 전부터의 목적과 계획 속 수많은 우여곡절과 고비들, 그리고 사건들. 물론 거기에는 몹쓸 사람도, 거리를 헤매던 여인도, 그리 썩 내세울 것 없이 오히려 부끄럽고 흠 많은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들, 내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의 못난 구석에도 불구하고, 올라가고 올라가다 보면 처음의 어버이, 그리고 그 위의 첫 시작의 창조주를 발견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 시작도 마침도 없으신 그 한 분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의 장구한 계획임을 마태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마치 아빠가 아직 철 모르는 아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마가복음의 글 첫머리에 선언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1)은 지금 여기서 비로소 시작되는 단편 드라마의 시작을 알리기 위함이 아니다. 그리고 이 짧은 문장은 단순히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타이틀이나 주제나 소재만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오래 전의 하나님의 계획과 뜻과 목적 가운데에서 비롯된 끝나지 않은 이미 시작된 대하 드라마를 들려주기 위함이다. 되었다. 그건 모노드라마도 아니고, 우리를 그 드라마로 부르시고 끼워 주신 그래서 우리 모두의 참여가 요구되는 살아있는 드라마(the Living Drama), 드라마들의 드라마(the Drama), 하나님의 드라마(the Drama of God)다. 그리고 누가의 말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보고 듣고 경험하고 목격한 실제의 사건이요 진실이며 (누가복음 1:1-4), 또한 요한이 말한대로 말씀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 그 태초에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또한 그로 모든 것들이 말미암았으며, 그의 오심과 구원은 갑작스러운 충동적 결정이 아닌,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 속에 있었다 (요한복음 1:1-18).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예수, 한 분으로 모아졌고, 마침내 여기 그 모든 계획의 시작과 끝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오셨다. 그리고 그때 그들은 보고 듣고 만졌다. 그리고 믿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경험한 이들, 그리고 그를 나의 주님,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었던 이들의 증언을 읽는다. 


우리는 이 드라마의 그 시작을 알 수 없고 또한 그 끝 역시 알 수 없다. 우리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욥기 41:1-3). 

그러나 믿음은 우리가 그 신기한 일들, 그 주님의 계획을, 그 구원의 드라마를 볼 수 있도록 한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욥기 41:5). 


믿음은 단지 읽고 듣는 것을 넘어 묻고 답하고 또 묻고 답하고, 그리고 눈으로 보는 것이다.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을 고치시고 물으신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가 대답한다. “선생님, 그분이 어느 분입니까? 내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그가 엎드려 절하며 말한다. “주님, 내가 믿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 묻는다, “그럼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요?” 라고. 예수께서 저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요 9:35-41)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빛이 왔으나 빛을 보지 못한다면 빛이 문제일까 보지 못하는 내가 문제일까? 더 나아가 빛이 빛인지도 모른다면? 


photo by noneunshinboo


누가 누구를 낳고, 그 누구는 또 누구를 낳고 . . .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 . .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1:13ㄱ, 12:1-2).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길 떠나는 가족으로 믿음의 족보에 내 이름 올리는 일은, 저 하늘에 지워지지 않는 살아있는 기억으로, 사그라지지 않는 점 찍히 듯 빛나는 별이 되는 것이다. 나쁜 짓 못된 짓 몹쓸 짓 잊히고 잊고, 좋은 짓 즐거운 짓 기쁜 짓 기억되고 기억하고, 그렇게 별들의 큰 강에 나 그 하나의 별 되어, 그렇게 믿음의 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어디가 북극성인지, 큰곰자리인지 찾고 헤매지 않고, 내가 하나님 가슴팍에 콕 박힌 그 별이 되어, 하나님의 그 참 빛을 나의 몸으로 삶으로 받고 내고, 나의 빛으로 그 분 찬미하고 경배하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화가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에서 가져왔다. 

성경은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길 떠나는 가족’ 그 여정의 기록이며, 지금 여기, 우리가 읽고 또 일상에서 사는 ‘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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