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회사이 Nov 05. 2021

로스코(Rothko)의 짙은 어둠

노는(遊)신부의 수상수런수다(5) 

Untitled (Black on Gray), 1969/70

– 로스코의 그림이 있는 풍경 (1)로

로스코의 그림이 있는 풍경 (1)


1.        

여기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 그림은 어둔 터널을 앞에 선 느낌, 어둔 터널 안에 있는 느낌, 그리고 어둔 터널을 막 빠져 나온 뒤 그 터널을 돌아보는 느낌, 그 모두가 이 한 그림 안에 있다.   


“나는 추상파 화가(abstractionist)가 아니다. . . . 나는 오직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들 – 비극, 희열(황홀감), 운명(죽음) 등 – 을 표현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그리고 나의 그림을 마주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 앞에서 무너져내려 오열한다는 것은 내가 그러한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들을 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 내 그림 앞에서 흐느끼는 그 사람들은 그 그림들을 그렸을 당시 내가 갖고 있었던 그 동일한 종교적 경험을 갖고 있다.”  또한 그는 “그림은 경험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경험이다” 라고 말한다. (<Mark Rothko>, Jacob Baal-Teshva, p.57) 


여기 로스코의 짙은 어둠은 어디서 온 것일까? 어떤 경험이 그의 어둠을 이토록 짙게 했을까? 그리고 그의 그림 앞에 무너져내려 흐느끼고 오열하는 사람들은 그의 그림 속에서 무엇을 보고, 그림을 통해 무엇을 경험한 것일까? 예전의 그들의 경험, 그들의 어둠을 본 것일까?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경험한 것은? 말 못할 내면의 짙고 깊은 무한처럼 어둔 어둠인가? 알 수 없는 미래,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의 시대을 말하는가? 전쟁이 가져온 비극들? 인간의 실존, 허무, 고독, 번민, 우울, 절망과 좌절, 공(空)과 무(無), 인간의 유한함 그리고 나의 존재 넘어의 범접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무한한 시간과 공간 혹은 영원? 아니면 하나의 초월, 신비, 황홀의 종교적 체험? 


이 로스코의 그림은 분명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이 그림이 그의 말년의 작품 중의 하나라는 것, 그리고 그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비록 모른다 할지라도 이 그림 속에서 죽음을 보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황무지 같은 황량하고 적막한 회색의 지평, 그 위에 어둠으로 꽉찬 그래서 그 무엇도 없이 비어있는 무한으로 열린 듯한 어둠의 공간은 임박한 죽음,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실존적 비극, 그래서 그리스의 비극의 한 편을 무대가 아닌 캔버스로 보는 듯 먹먹하고 슬프다. 갖은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처한 비극적인 현실, 현실적인 비극, 그래서 푸른 빛의 슬프고 무력한 회색의 대지(大地). 그 위, 그 모든 몸부림을 덮어버리려는 듯 달콤한 무관심처럼 부드럽지만 거친 없음의 검은색의 허공(虛空). 


그의 작업실에 초대받은 이들 중 누군가는 이 그림을 통해 그의 죽음을 예감하기도, 혹은 누군가는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떠 있는 달을 연상하기도, 혹은 그저 밤 하늘을 찍은 어떤 사진을 연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직 로스코 자신만이 자신의 내면 세계를 알 수 있듯, 오직 로스코만이 알것이다, 이 그림이 무엇에 대한 자신의 경험이며 또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를. 그것이 단지 죽음과 비극인지, 아니면 그 너머의 것인지를. 

로스코는 무엇을 그리는 것이 아닌 오히려 무엇을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림 앞에 선 이의 몫으로 남겨 놓는다. 무엇을 보는가, 무엇을 듣는가, 무엇을 느끼는가, 어떤 내면의 이야기와 경험을 발견하는가, 보는 이의 몫이다.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 앞에 선 이들을 그 그림 안으로 빨아들인다. 


가까이 다가설 수록, 가까이서 볼 수록 짙어지는 검은 어둠, 그리고 끝이 없는 듯 깊어지는 검은 공간, 그리고 그 아래 저 옅어지는 푸른 회색의 어둠 혹은 짙어지는 검은 회색의 공간. 그리고 그 사이의 없는 듯 있는 듯한 약한 회색의 경계는 그 어둠을 더욱 짙게 하는가 아니면 옅게 하는가? 이 그림은 모짜르트의 레퀴엠을 귀가 아닌 눈으로 듣는 듯 극적이다. 손으로 그 레퀴엠을, 죽음을 만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폭풍우가 부는 창 밖의 풍경을 창 안에서 바라보며 듣는 레퀴엠의 그 역동적인 비장미가 오히려 삶을 살아있는 드라마로 보다 드라마틱하게 살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처럼, 보면 볼수록 이 그림에서 오히려 나는 새 생명, 새 삶의 약동에 대한 깊고 절실한 허기가 느껴진다. 실컷 울고난 후의 씻은 듯 상쾌해진 정신의 피곤함과 울음의 노동으로 나른해진 몸의 노곤함으로 죽은 듯 빠져 드는 내일을 위한 깊은 잠 같은 희망을 본다. 


2.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창세기 1:1-2, 공동번역)


그의 그림 앞에 선 이들은 어둠만을, 그리고 그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어쩔 수 없고 어쩌지 못하는 자신의 작음과 초라함만을 보는가? 그저 철저한 희생자, 피해자, 길 끝에 선 자로 그 앞에 서 있는가? 짙은 어둠을 마주하다 못해 그 짙은 어둠에 뒤덮인 깊고 깊은 어둔 물이 되어버린 자신만을 보는가? 거기서 무슨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은 그 깊음 속의 막막함만을 보는가? 빨려들 듯한 무한의 어둠, 그래서 도저히 가늠할 수 없고, 끝 간데 모르게 이어질 듯한 영원의 시간과 공간, 그 알 수 없음으로 하여 나 역시 없음(無)이 되어버리는 그래서 나에게는 오직 짙고 깊은 어둠일 수 밖에 없는가? 그렇게 깊은 물 위를 감싸고 뒤덮은 어둠은 더욱 짙어지고 어둠에 뒤덮인 물은 더욱 깊어지기만 하는가? 


photo by noneunshinboo


그리고 바로 그때, 짙은 어둠이 뒤덮은 깊은 물 위에 하나님의 영이 휘돌고 몰아치며 하나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 1:3). 


나는 이 그림을 통해 희망이 보고싶다. 그리고 어둠 앞에 서는 것, 어둠을 마주하는 것, 그리고 그 어둠을 응시하는 것을 나는 짙게 기다리기, 깊게 바라보기라 바꾸어 말하고 싶다. 어둠을 마주하는 것은 분명 아프다. 지금의 어둠도 충분하다, 예전의 어둠마저 끄집어 내고 싶지 않다, 할 수 있다. 아픔에 아픔을 더하고 싶지 않다, 할 수 있다. 어둔 아픔을 더욱 짙고 깊게 하는 것 밖에 되지않느냐, 할 수 있다. 계속될 어둠에서 무엇을 바랄 수 있느냐,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 비록 로스코가 어떤 의도를 갖고 어떤 의미를 주려고 이 그림을 그렸든 이 그림이 보는 이들에게로 넘어 온 이상 그 해석은 열려있다고 나는 믿는다 – 그 어둠을 참을 수 없는 어둠, 사라짐의 어둠만으로 보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고 그 어둠을 무시하듯 옅게 혹은 흐리게 하려는 시도 역시 멈추라 한다. 한 번 제대로 그 안을 들여다보고 또 들어가라고 한다. 좌절과 절망, 허무의 어둠, 그러나 위안도 희망도 결국 그 안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선 실컷 울어나 보라고. 맺힌 것 풀라고. 유한한 나의 맺힌 것들을 무한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내 존재 넘어의 훨씬 큰 존재에게 실컷 퍼부어나 보라고 말한다. 그렇게 비우고 비우다 보면 또 다른 허기가 찾아올 것이니, 그 허기에서 새로움은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로스코의 이 그림을 그렇게 보고 듣는다. 


(로스코의 그림이 있는 풍경 2에 계속)

작가의 이전글 족보에 내 이름 올리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