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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Nov 06. 2021

로스코(Rothko)의 짙은 어둠 짙게

노는(遊)신부의 수상수런수다(6)



로스코의 그림이 있는 풍경 (2)


3.        

아프고 슬픈 경험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희망을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경험이 미래로 열린 문일 수 있음을 로스코의 그림을 통해 본다. 밝음에 제 자리를 내어주고 물러나는 어둠, 가만히 응시하는 그 어둠은 단지 아무것이 없는 어둠, 고통과 절망, 모든 것의 끝, 그리고 죽음인 어둠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새로운 시작의 어둠, 밝음을 머금은 어둠, 새 것을 잉태한 어둠, 눈부시고 찬란한 밝음을 창조하는 어둠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어둠 속, 눈을 뜨나 감으나 보이지 않고 알지 못하는 그 어둠, 그러나 여전히 어렵고 힘겨워도 눈은 그래도 뜨는 것이 덜 두렵고, 그래서 짙고 꽉찬 어둠을 거짓없이 보고, 더듬더듬 꾹꾹 눌러 걷고, 지금 여기를 솔직히 살 때, 비록 어둠 속 없는 듯했던 밝음이 비록 그 희미하지만 어둔 푸른 회색으로 오고 있음을, 어둠이 조금 옅어지고 있음을, 그렇게 조금 옅어지는 어둠과 조금씩 짙어지는 밝음의 하얀 회색 지대로 오고 있음을, 그 회색의 신비를 보게 될 것이라 믿는다. 


“. . .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해는 빛을 잃고, 성전의 휘장은 한가운데가 찢어졌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는 숨을 거두셨다. ” (눅 23:44-46, 새번역)

모든 것이 끝났다. 모든 것이 그저 어둠일 뿐이었던 그 며칠이 지났다. 그리고 침통한 표정의 여인들이 무덤으로,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때 환하게 밝고 눈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가 갑자기 그들 앞에 선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눅 24:5)

그리고 같은 날, 예수의 죽음, 그 분의 무덤을 뒤로한 채 엠마오를 향하여 두 사람이 어둠속을 걷는 듯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가고 있었다. 그때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어두워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눅 24:13:16).  


그림은 묻는다. 내가 여기 보는 회색은 어두워지는 회색인가, 밝아지는 회색인가? 누구에게는 절망일 수도 누구에게는 희망일 수도 있는 회색은 짙은 어둠과 아직 오지 않은 밝음의 그 사이로 있고, 우린 자주 혹은 오래 그 사이에 서고 그 사이를 걷는다. 


photo by noneunshinboo


4.        

로스코의 그림에는 뚜렷한 라인이 없다. 명확한 경계선, 선긋기가 없다. 라인을 포기한 그 곳에는 오직 컬러, 공간만 있다. 검은 지대와 회색 지대, 그리고 명확하지 않은 경계 혹은 사이의 공간. 그러나 경계선의 불명확함이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는 것의 손쉬움을 말하진 않는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보는 이상적인 거리를 45센티미터라 한다. 이해를 멈추고 자신이 그린 색의 공간 그 안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충분히 거기 머물라고, 기다리라고 한다. 여기와 저기의 공간과 시간의 순간적인 이동, 그런 손쉬운 초월적 점프는 없다. 오히려 저기로 건너감 혹은 여기로 건너옴의 그 의미 없음, 그 차이 없음을 말하는 듯, 그래서 그의 그림 속 서로 다른 색의 공간들이 뚜렷한 경계선이 없이 서로 마주한다. 선이 아닌 공간들이 마주서고 마주보고, 이 곳과 저 곳의 선택이 아닌 하나로 있고 우리는 이 곳을 그리고 저 곳을 그리고 그 하나됨을 본다. 그리고 그 너머를 본다. 


로스코의 그림을 보는 일은 일상에서 벗어나 숨 고르는 일이다. 로스코의 그림은 쫓기 듯 힘겹고 가쁘게 쉬던 숨을 뱉어내게 한다. 여러 긴 말도 설명도 변명도 필요 없이 그저, 나에게 내가 하는 위로의 긴 한 숨, 그리고 침묵의 쉼과 겸손. 그리고 짙은 어둠과 깊은 공간이 조용히 건네주는 위로의 말. 지금 내 앞의 어둠을 어설피 잘 안다 하지 말고, 섣부르게 벗어나려 하지 말고, 곧 끝나겠지 쉽게 예단하지 말고, 나에겐 이만 충분하다 됐다 자신하지 말고, ‘왜 하필 나에게’ 너무 억울해하지 말고 힘겨워도 지금 여기 더 짙고 깊게 그리고 길게 보고, 걷고, 살아내는 일이 필요하다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뒤 덮은 짙은 그 어둠의 시간은 회색으로 옅어지고, 깊음의 그 검은 공간은 또한 회색으로 얕아지고, 조금씩 조금씩 옅어지고 얕아지며 뒤로 밀려나는 어둠은 순식간에 밝음이 되어 어느새 거기에 나 있을 것이라고.  


로스코의 이 그림을 실제로 볼 날이 오면 좋겠다. 45 센티미터의 거리에서 한 번, 그리고 한 번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고 싶다. 그리고 또 한 번은 그의 그림 앞에 선 이들에 의해 가려진 그의 그림을, 그 색의 공간 안으로 들어간 이들을 뒤에서 보고 싶다. 그 때가 되면 난, 검은 공간과 시간, 그리고 회색의 공간과 시간, 그리고 그 너머의 공간과 시간, 여기와 저기를 잠깐씩, 때론 오래, 더 때론 여기 혹은 저기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기도 했었음을 조금은 깨닫게 되지 않을까? 그때의 난 이 그림 속 어디에 있는 나를, 그리고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때가 되면 밝음은 밝음 대로, 어둠은 어둠 대로, 또 그 모두를 제대로의 하나로 볼 수 있을까? 


창조하는 어둠, 그 신비. 세상을 사는 일이 결국 고되고 힘겨운 우리 사람의 일이라는 것, 그러나 밝음은 밝음대로, 어둠은 어둠대로 깊고 짙게 보고 사는 일 또한 우리 사람의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 일이 신비를 살아내는 일이라는 것을 로스코는 그림을 통해 보여주려하는 것은 아닐까? 한 편의 격정적인 드라마 같은 그의 그림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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