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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Nov 07. 2021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죽고 사는 길 걷는 예수 (2)

photo by noneunshinboo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마가복음 1:4-5)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밥 먹어라’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하던 것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풍경, 회개의 세례는 그런 아름다운 풍경의 시작이다.  


회개는 죄의식 조금 씻어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던 길 내쳐 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조금 고쳐 가는 것도 아니다. ‘다른 길로 나 이제 가겠습니다’, ‘여기까지 왔던 나의 길은 엉망이었습니다. 나 이제 고백합니다’, ‘지금 가르쳐주시고 알려주시고 보여주시는 그 길 나 이제 가겠습니다’, ‘하지만, 나 혼자는 못가니, 나 그 길 모르니, 같이 가주십시오’, 그리고 ‘그 길 정말 외로운 길일 테니 나 여기 이들과 그 길 함께 가겠습니다’ 하는 것이다. 

회개는 그렇게 새 길을 ‘홀로’ 그리고 ‘함께’ 걷는 것이다. 회개는 그렇게 ‘헌 집 줄께 새 집 다오’ 하며 헌 집과 새 집 죄다 갖겠다 욕심내지 않고, 헌 집은 옛다하며 줘버리는 것이다. 헌 집을 어떻게든 리노베이션해서 다시 들어가 사는 일도 아니다. ‘이건 아니다, 이 집은 아니다’하며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나는 일이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새 집 찾는 일이고 그 새 집에 들어가 사는 일이다. 


회개의 세례, 그 줄에 서는 것은 헌 집, 헌 땅을 떠나 새로운 집, 새로운 땅을 향해 ‘길 떠나는 가족’*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새 땅을 찾아 떠난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의 마음이 여전히 거기 우르를 떠나지 못한다면,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난 모세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 거기 이집트에 남아 있다면, 거기에 남아 있는 마음, 거기에 두고 온 마음, 거기를 떠나지 못하는 그 마음은 길 가는 내내 유령처럼 그들을 찾아와 괴롭힐 것이고, 그들은 그 약속의 땅, 새로운 땅을 밟지도 못한 채 광야를 좀비처럼 헤매고 떠돌 것이다. 


photo by noneunshinboo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엡 4:22-24)


회개는 ‘헌 나’는 가고 ‘새 나’가 오는 일, ‘헌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일이다. ‘옛 길’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새 길’은 시작된다. ‘옛 나’를 버리는 그때 ‘새 나’는 출발한다. 내가 오던 길이 끝나는 거기에서 새로운 나의 길은 출발한다. 이제까지 걷던 길이 흙먼지 날리는 신작로였든, 굽이지고 어두웠던 계곡의 길이였든, 화창한 봄날의 꽃길이였든, 엄동설한의 매서운 길이였든, 없는 듯 잡풀속 어둔 길이였든, 아니면 산등성이로만 걷던 시원스런 길이였든, 이제 그들 모두가 가야할 길은 집으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길, 바로 새로운 길, 예수의 길이다. 그것은 이 길에서 저 길로 기차가 선로를 변경하는 것 처럼 전혀 다른 길이다. 그리고 회개의 세례는 그 선로 변경, 새 길의 시작점이고 출발점이다. 그러나 회개는, 그 ‘길’은 불행 끝 행복 시작, 그 한 점, 하나의 순간으로 있지 않다. 길은 걸어야 길이 되며, 그래서 길은 과정이며 여정이다.  


회개는 단지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의 죄의 용서, 관계의 회복, 삶의 변화만을 말하지 않는다. 회개는 ‘내가 잘못했습니다’하며 죄의식을 내 안에서만 풀어내고 씻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립서비스가 아니다. 회개는 개인화, 영성화되어 오직 나의 개인적 종교 생활의 영역, 내 속 깊은 내면의 세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하나님만 아시면 된다’도 아니고, ‘세상은 몰라요’도 아니다. 나의 교회 건물 안에서만, 나의 동료 신자들안에서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그리고 나와 너 그리고 우리 사이 모두를 포함한다. 또한 지금 여기 내가 꾸려가는 실제의 삶과 일상의 영역 그 모두를 포함한다. 그래서 자칫 추상화, 관념화, 영성화로 빠질 수 있는 회개는 그 구체적, 실천적, 그리고 실제적으로 변화된 삶을 통해 비로소 뼈와 살을 갖는다. 존재의 변화는 삶, 일상의 변화를 통해 보인다. 그래서 회개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명사가 아닌 동사로 있다.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 .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 ”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 .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 .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 (눅 3:7-14)


그리고 요한이 말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막 1:8)

요한이 주는 물의 세례는 위를 향한 도약이다. 그러나 도약에서 멈춘다면 땅은 그리 멀지 않다. 땅으로 곤두박질하기 전에 바람을 타야 한다. 오실 그 분이 주실 성령의 세례는 바로 새 삶, 새 생명의 바람을 타는 것이다. 그 바람은 성령의 바람, 참 생명의 바람이다. (참조, 요 3:8, 행 2:2-3, 창 2:7) 


저기 그 분이 오신다, 저기 그 바람이 분다.  


* 화가 이중섭의 그림 ‘길 떠나는 가족’에서 나는 늘 화가의 본래의 의도와는 별개로 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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