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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Oct 21. 2021

빈 마음에 빛이 머문다

노는(遊)신부의 수상수런수다(3) 

photo by noneunshinboo


빈 무대가 있는 풍경 (1)


난 텅 빈 무대가 좋다. 재촉하지 않아 좋고, 재촉 당하지 않아 좋다. 채우지 않아 좋고, 채울 수 있어 좋다. 몸 바쁘지 않아 좋고, 마음 또한 바쁘지 않아 좋다. 무얼 뺄까 고민 없어 좋고, 무얼 더 할까 궁리 없어 좋다. 누가 볼까 안절부절 없어 좋고, 누가 안 볼까 근심 없어 좋다. 이래도 될까 불안 없어 좋고, 이래도 되지 걱정 없어 좋다. 누구 눈치 볼 일 없어 좋고, 누구 눈치 줄 일 없어 좋다. 맘대로 쉴 수 있어 좋고, 맘대로 꿈꿀 수 있어 좋다. 무엇이 없지만 무엇이 있는 무대, 무엇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무엇을 하고 있는 무대, 내가 무엇을 보고 있진 않지만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 무대, 그래서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는 무대. 마음과 생각이 내 맘껏 놀 수 있어 난 그 텅 빈 채로 있는 무대가 참 좋다. 


장자의 인간세(人間世)편에 있는 이야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기 란 쉬워도, 뭘 하면서 표나지 않기 란 어려운 법이지. 사람이 뭘 시키면 속이기 쉽지만, 하늘이 시키면 속이기 어려운 법이야. 날개가 있어 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날개 없이 난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겠지. 지식이 있어 안다는 얘기는 들었겠지만, 지식 없이 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을 것이네. 저 텅 빈 곳을 보게. 텅 빈 방이니까 빛이 가득하지 않는가! 행복도 텅 빈 마음에 머무는 것이네. 그럼에도 <텅 빈 마음>을 지니지 못하면, 몸은 앉아 있어도 마음은 달리는 것이지.” (<정호경 신부의 장자 읽기> p. 112)


어깨와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간 어설픈 무대 조명가의 요란하고 시끌벅적 한 컬러들과 듣보잡 무늬로 난리 블루스 된 무대는 보는 이를 참 총천연색으로 시끄럽고 싸이키델릭하게 어지럽게 한다. 그러나 자연스레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시시각각 시나브로 변하는 하늘 빛, 태양 빛, 그리고 달 빛을 닮은 그 빛 만으로도 그만 충분하다, 하며 자꾸 비우고 비우는 고수의 향기가 나는 조명가의 무대는 보는 이를 참 편안하게 한다. 마음을 비우니 빛이 그 자리를 채운다. 


의욕 과다 무대미술가의 무대는 피카소와 바스키아, 고호와 앤디 워홀, 그리고 김홍도와 백남준, 신구와 동서양을 넘나들며 동남아와 구라파 공연을 방금 끝내고 돌아와 한자리에 모인 초호화 군단들의 카퍼레이드 반기는 듯 흩날리는 꽃가루들 속에 숨은 배우들 찾느라 관객들 생 고생시킨다. 그러나 그 앞뒤없이 꽉꽉 채우려는 욕심을 비운 선수의 포스가 느껴지는 무대미술가의 무대는 어디든 눈을 두기가 편하다. 마음을 비우니 배우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뭔가 해내겠다 작심한 갓 데뷔한 연출가, 온 우주를 채우려는 듯 영혼까지 끌어 모아 없는 것 있는 것으로 무대를 채울수록 비어가는 것은 객석의 관심이요 채워지는 것은 그 연출가를 향한 제작자의 미움일 것이다. 그러나 그 세상을 구원하려는 수퍼 히어로의 마음을 비운 스타워즈의 요다 같은 연출가의 그 없어 보이는 무대는 참 있어 보인다. 마음을 비우니 관객의 마음이 그 자리를 채운다. 


그렇게 무대는 채우는 맛이 아니라 비우는 맛이라는 것을 초짜들은 조금씩 배워 나간다. 물론 그 이치를 배우다 지쳐 관둔 이들도 꽤 있고, 아예 배울 생각도 없는 이들은 더 많다. 


photo by noneunshinboo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3).”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 그게 텅 빈 마음이 아닐까? 그리고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비어있는 채로의 정지된 상태나, 듣기 좋고 말하기 좋고 생각 쌓기 좋은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 관념이 아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는’,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그 길을 걷는 움직이는 마음이 아닐까? 가난한 마음은 ‘비워지고 비어 가고 있는’ 마음, 속 시끄럽지 않은 마음, 텅 빈 마음. 지금 여기 되어져 ‘있는’ 마음이 아닌 ‘걷는’ 마음, 걷고 걷다가 나도 모르게 ‘되어가는’ 마음, ‘비워져 가는’ 마음, 그래서 그 비어지는 만큼 하나님, 하늘 나라가 와서 ‘머무는’ 마음, 그래서 점점 ‘차오르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의 그 ‘마음’에 방점을 찍고 싶은 마음은 알겠으나, ‘가난한 마음’이 마치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그냥’ 마음, 생각, 그리고 흔히 말하는 심령/영에 국한된 것이라고 여기는 그 마음은 썩 좋은 마음은 아니고, 그리 가난한 마음도 아닐 듯싶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누가복음 6:20).”


실질적, 물질적, 경제적, 육체적 가난함을 마음의 가난함, 정신적 가난함, 그리고 고상한 차원의 영적 가난함으로 퉁치려 하거나 어물쩍 넘기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정말' '진짜'의 아프고 배고프고 상하고 지치고 갇히고 슬프고 억눌린 그 가난함이 먼저다. 여기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이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라 믿는다면, 분명 그분께서는 늘 그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의 주린 배를 채우셨고 그들을 고쳐 주셨고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말이다. 흔히 채우고 또 채우고, 그러나 여전히 부족하다 거듭 채우는 눈에 보이는 나의 무대는 눈 감은 채, 눈에 보이지 않는 나의 마음 무대만 가난하다 비었다 말하고, 뻔히 보이는 남의 정말 비어있는 무대는 못 본 척 하며 그들의 보이지 않는 마음 무대도 또한 비우라는 그 염치없음은 정말 못된 마음이다. 무대 위, 배 고픈 배우는 속 무대든 겉 무대든 무얼 채우고 비우고 할 것도 그럴 여력도 없다. 먼저 그 배우의 그 허기진 배 우선 채워야 하지 않을까? 그 참에 나의 보이는 무대, 그 겉 무대 조금 비워 저들의 텅 빈 무대, 그 배고픈 배우들 측은히 여겨 그들의 무대, 그들의 배를 내 할 수 있는 대로 조금이나마 채우는 그 마음이 사실 가난해지는 마음, 가난한 마음이지 않을까? 그럴 때 그 비워지는 만큼 빛이 거기 머물지 않을까? 내 것 비울 마음 없는 꽉 찬 마음, 꼭꼭 걸어 잠근 마음에 빛이 들어갈 틈이 없어 빛이 아닌 어둠만 가득할 것이다. 


빛은 텅 빈 무대를 채우고, 행복은 텅 빈 마음에 와 머문다. 


(빈 무대가 있는 풍경 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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