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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Oct 21. 2021

밴쿠버의 비는
배경처럼 내린다

노는(遊)신부의 틈과 사이로 본 밴쿠버의 여백이 있는 풍경(6)

photo by noneunshinboo


밴쿠버의 우중산책 (1)


밴쿠버에는 벌써 비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가을을 재촉하던 비는 조금씩 깊어가는 가을을 따라 부쩍 잦아지며 며칠씩 이어가고, 곧 겨울로 바뀌어도 여전할 것이며, 또 그 겨울을 훨씬 지나 노란 수선화의 봄이다 싶을 그때까지 쉬었다 이어가고 또 쉬었다 이어가고 그럴 것이다. 작년에도 그랬고, 또 그 전에도 그랬었다. 그렇게 세 계절을 넘나들며 밴쿠버의 비는 배경처럼 내린다. 


황순원의 ‘소나기’처럼 한 소년과 소녀에게 잊지 못할 순수한 사랑의 설레임의 기억을 주었던 싱그런 비를, 8월의 크리스마스의 비처럼 웃음에 어설픈 사진관 아저씨와 사랑에 수줍은 주차단속 여자를 어색함 속 한 우산으로 걷게 한 그런 선물 같은 비를, 나는 여기 밴쿠버에서 아직 만나질 못했다. 여름 한 낮, 순간 ‘쏴아아’ 하며 요란스레 모든 이들의 시선을 모으고 관심을 끄는 주인공 같은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비는 밴쿠버에 없다. 가을비 우산 속 홀로 걷는 이들의 외로움을 더하며 거리를 온통 젖은 낙엽 냄새로 가득하게 만드는 마음 또한 젖게 하는 그런 비도 없다. 서늘한 매력을 지닌 영화 속 여인의 도도함으로 차마 말은 걸지 못하고 그 뒤를 종종거리며 옷깃 세워 걷게하는 차가운 겨울비도, 봄비 속에 떠난 사람 애써 기억해내 아파할 일도 ‘우산 같이 쓰실래요’ 로맨스 만들어 낼 일도 없는, 그런 조연 같은 비 역시 밴쿠버에는 없다. 




밴쿠버의 비는 세 계절을 그냥 내리고 또 줄곧 내린다. 일상처럼 내리는 비다. 특별할 것도 없고, 부산떨 일도 없다. 밴쿠버의 비는 나에게는 그렇게 내린다. 특별히 맵거나 짜거나 톡쏘거나 하는 어떤 짜릿한 맛이 느껴지진 않는, 딱히 맛깔스럽다 할 수 없는 비. 그렇다고 비에 무슨 맛이 있다거나, 내가 무슨 비의 맛을 보았다거나 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왠지 밍밍할 것 같고 밋밋할 듯 싶고, 줄곧 내리고 내리니 무슨 맛이 더 남아 있을까 싶은 밴쿠버의 비다. 여기 밴쿠버 바닷물도 그 비를 닮아 왠지 그 짠맛이 덜할 듯 싶다. 그래서 그런지 10분이면 바다인데 바다가 저기 아직 있나 싶을때가 종종 있다. 그나마 갈매기들이 아 저기 바다지, 일깨운다. 바닷물이 많이 빠졌다 싶을때면 비릿한 바다 냄새가 바람결에 조금 느껴지는 것은 그냥 내 느낌일지 모른다. 


비 소식에 나는 습관처럼 우산을 챙긴다. 그러나, 왠만한 비에는 우산이 없다 치고 그냥 맞으며 걷는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귀찮다. 비가 귀찮은 것이 아니라, 우산이 귀찮다. 비를 신경 쓰기엔 비가 너무 자주, 오래, 길게, 줄곧, 온다. 그래서 비 보다는 우산이 귀찮다. 그러니 어지간한 비에는 왠만하면 우산 없이 산다. 


여기 밴쿠버의 사람들은 우산 ‘없이’ 잘 지낸다. 우산이 ‘없어’ 비를 맞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산 ‘없이’ 비를 맞는다. 비가 오면 오는대로, 비가 와도 할 것은 하고 안 할 것은 안 하고, 못 할 것은 그냥 안 하고 그렇게 비를 잘 지낸다. 어제도 내렸고 오늘도 내리고 내일도 내릴 비를 일일이 탓하며 할 것 안 하고 살기엔 비는 배경처럼 내린다. 그러려니 하며 내리는 비, 그러려니 하고 맞는 것이 상책이다. 나 역시 때론 조금 많다 싶은 비를 맞으며 두 시간 넘게 우산 없는 우중산책을 즐기곤 한다. 서당 3년이면 개가 풍월을 읊고, 밴쿠버 3년이면 그 개 끌고 우산 없이 산책을 한다. 그렇게 밴쿠버의 비는 그러려니하는 하나의 배경이 되고, 밴쿠버의 사람들은 그 배경을 그러려니 걷고 뛰고 달리며 잘 산다. 


밴쿠버의 비는 나 보라는 듯 무대를 휘젖고 주무르는 무대 위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주인공과의 어떤 관계나 특별한 인연을 맺은, 그래서 극의 중요한 키를 쥔 채 등장하여 보는 이들의 이목과 관심을 끄는 주연 중의 한 명도 아니다.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채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어떤 상대도 아니다. 굳이 의식해야 할 그 누구 혹은 그 무엇도 아니다. 무엇을 하고 안 하고를 결정해야 하거나 어떤 의미있는 리액션을 주고 말고를 해야 하는, 극의 흐름을 어느정도 책임지는 조연 혹은 조연의 그 무엇도 아니다. 그냥 그러려니 의식함 없이 그 앞을 그 옆을 걷고 뛰고 달리고, 그래서 거기에 있는 그러려니의 무엇이다. 그래서 밴쿠버의 비는 배경처럼 내리고 여백처럼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앞을 우산 ‘없어’가 아닌 ‘없이’ 그 비를 맞으며 걷고 뛰고 달린다. 


photo by noneunshinboo


우산 ‘없어’ 비를 맞으며 걷는 것과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걷는 것에 차이는 있을까? ‘없어’와 ‘없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물론 비를 맞는다는 것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차이는 없다. 그러나 비를 맞는 당사자에게는 그 ‘없어’와 ‘없이’의 차이는 분명 있을 것이며, 사실 그것을 바라보는 이가 갖는 감정의 질감에서도 차이는 있을 수 있겠다. 그리고 그 차이는 무엇보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가령, 우산 ‘없어’ 비를 맞으며 걷는 주인공은 왠지 ‘처량해’ 보이고,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걷는 주인공은 왠지 ‘사연 있어’ 보인다. 우산 ‘없어’ 비를 맞으며 걷는 주인공은 정말 ‘없어’ 보이고,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걷는 주인공은 되려 ‘있어’ 보인다. 우산 ‘없어’ 비를 맞고 걷는 주인공을 보면 ‘쯧쯧’ 혀차는 소리 나오지만,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걷는 주인공은 나를 말없이 바라보게 만든다. 우산 ‘없어’ 비를 맞으며 걷는 주인공은 ‘밖에 비오나? 우산 꼭 챙겨야지’ 하는 마음 갖게 하고,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걷는 주인공은 있는 우산도 내려놓고 그 옆에서 비 맞으며 함께 걷고 싶게 만든다. 우산 ‘없어’ 비를 맞으며 걷는 주인공은 그 처량한 신세가 나에게 옮아올까 나의 마음 닫게 하고,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걷는 주인공은 그 사연에 나의 마음을 열어 그 정(情) 나누고 싶게 만든다. 그리고 우산 ‘없어’ 비를 맞고 걷는 주인공의 그 남이 맞는 비는 으슬으슬하여 나의 어깨를 저리게 하고, 우산 ‘없이’ 비를 맞고 걷는 주인공의 그 남의 비가 나의 비 되어 나의 마음 저려온다. 


그러나 이런 ‘없어’와 ‘없이’가 주는 차이를 나는 일상처럼 배경처럼 내리는 밴쿠버의 비를 통해서는 느끼지 못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내리는 비, 우산이 ‘없어’건 ‘없이’건 제 멋에 제 맛에 그냥 맞으며 걷고 뛰고 달리는 사람들에겐 그런 영화나 드라마 속 우산 ‘없어’와 ‘없이’의 차이는 의미도 없고, 찾을 수도 없고, 굳이 찾으려 애쓸 필요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사연이 있어 보이기에는 모두들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비를 맞으며 잘 걷고 잘 뛰고 잘 달리며 잘 산다. 그러니 무슨 사연이 있으세요라고 묻기도 조금 애매하고 아마 말 못할 사연이 있을꺼야 라고 속으로 생각하기에도 사실 민망하다. 




배경처럼 내리는 밴쿠버의 비. ‘없어’도 좋고 ‘없이’도 좋고, ‘없어’를 ‘없이’로 보이려 애쓰지 않아도 좋고, ‘없어’를 ‘없이’로 감추려 하지 않아도 좋고. 평범한 일상 같은 은근한 멋스런 ‘없이’로 보이려 공들일 필요 역시 없어 좋다. 비 오는데 ‘뭐 굳이 저렇게까지 대놓고 멋지게 차려 입은’ 사람들의 의도적인 ‘없이’의 티, ‘난 촌스럽게 티 내지 않아’ 하는 꾸미지 않은 듯 그러나 누가 봐도 꾸민 고급진 ‘없이’의 꾸밈, ‘천천히 시간을 두고 보아야 느껴지는 나의 멋이야’ 라며 굳이 이 비에 멈추고 봐주기를 바라는 그 애쓴 멋을 낸 이들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줄곧 오는 비에 ‘없어’든 ‘없이’든 비 맞는 것은 매 한 가지니, 굳이 서로를 신경쓰기에는 너무 번거롭고, 그래서 다들 무시 아닌 무시 속에 제 갈길 가게 만드는 여기의 비가 나는 좋다. 

‘없어’를 ‘없이’로 사는 삶이 편하고, ‘없어’와 ‘없이’ 그 둘의 차이 사실 별로 ‘없음’을 조금씩 알아가는 나이가 되어가는 중이라 그런지 별 차이 있겠냐는 듯, 설사 있다 한들 애써 그 차이를 굳이 드러내고 또 그 차이 알아야 할 필요 있겠냐는 듯, 그 차이 없다 하며 또 없게 만드는, 배경처럼 내리는 밴쿠버의 비가 요즘 나는 더욱 좋아진다. 나는 요즘 그 비를 우산 ‘없이’ 맞으며 걷는 나의 젊지 않은 나이가 좋다. 그리고 오늘 그 비, 아내와 함께 맞는 비여서 더욱 좋다. 


우산 ‘없어’도 좋고, 우산 ‘없이’도 좋다. 함께 맞는 비는 그리 궁상스럽지 않다. ‘있는’ 우산 내려놓고 우산 ‘없는’ 사람들과 함께 맞는 비, 비록 우산 ‘없어’ 맞는 비여도 함께 맞는 비는 그리 차갑지 않을 것이다. 우산 ‘없어’가 아닌 ‘없이’로 비를 걷는다면 뭔가 ‘있어’ 보이는 주인공처럼 폼 나지 않을까? ‘없이’로 함께 걸으면 황야의 7인처럼 함께 폼 나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 ‘없어’를 ‘없이’로 함께 걷고 산다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좀 더 폼 나지 않을까? 


밴쿠버의 우중산책. ‘없어’와 ‘없이’를 구별하지 않는 배경처럼 비는 내리고, 우산은 있어도 없어도의 소품이 되고, 사람들은 오늘도 주인공으로 그 비를 걷는다. 비가 찍어낸 선물처럼 주는 인생 영화의 멋진 한 컷이다.  


(우중산책 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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