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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Oct 06. 2021

기도란 그런 게 아닐까?

노는(遊)신부의 수상수런수다(2)


photo by noneunshinboo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누가복음 18:38)


하나님께 말 못할 속사정 어디 있고, 하나님께서 못 들으시고 안 들으실 속사정 어디 있을까? 못 듣겠다 안 듣겠다 하실 별 사정 또 어디 있을까? 

“너 말 가려해라, 안 그러면 큰 탈 난다” 해도 그건 상대를 봐 가며 하라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분명 하나님은 그런 이것 저것 꼭 가려서 말해야 하는 어렵고 무서운 분이 아니시고, 오히려 내 속 모르는 이가 아닌 이미 그 속 훤히 들여다 보시고 훤히 다 아시는 그래서 가려할 필요 없는 분이시니, 그래서 기도란 그 한 분께 가림없이 내 속에 고인 물, 더러운 물, 그 물 죄다 바깥으로 쏟아내 비우고, 꼬일 대로 꼬인 내 속 휴지 풀 듯 술술 풀어내 가벼워지는, 나의 ‘속내’를 보이는 일이고, 나의 ‘속나’를 드러내는 일이다.


그래서 기도는, “아이고 내 팔자야” 하며 제대로 맘껏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홀로 된 이들의 속사정, “잘 지낸다니까 엄마” 짜증내며 전화 끊고 몰래 훌쩍훌쩍 차마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남의 집 귀한 딸의 시집살이 속사정, “니 아빠 도대체 언제까지 고생시킬 거니” 주는 것 없이 잔소리하는 고모의 눈칫밥 먹는 조카 속사정, “시집 안가!” 하지만 안가는 게 아닌 못 가는 노처녀 속사정, “전 좋아요. 영광이죠” 헤헤 웃으며 꼰대같은 직장 상사와 야근해야 하는 신입의 속사정, “전화 받으세요” 친구들 한번 만나자는 전화벨 못들은 척 안 듣는 취업 재수생 속사정, “건강하시죠, 그럼 또 전화 할께요, 끊어요” 말해 놓고 한 달에 한 번도 전화 못 드리는 불효자녀 속사정, “갔다 올께” 하고 집 나와 공원 벤치 전전하는 멀쩡한 바깥 양반들 속사정, “잘 다녀오세요” 웃으며 모르는 척 속으로 말 삼키며 애꿎은 애들만  잡는 그 바깥 양반들의 와이프들 속사정, “그래 알았어 기다려봐” 또 보험 들라는 친구 전화에 속 있는지 없는지 꼬박꼬박 말 들어주는 남편 지켜보는 아내 속사정, “너나 잘해” 해놓고 정말 나만 빼고 다들 잘하면 어쩌지 걱정되는 삼수생 속사정, “난 관심 없어” 하지만 도저히 부모님께서 내민 사진에서 눈 뗄 수 없는 노총각 속사정, “니넨 좋겠다, 아무 걱정 없어서” 라는 유치원 선생님의 속 모르는 소리에 속 터지는 유치원생들의 그 가득한 속사정, 그 모든 속사정들 “누가 알까, 너 빼고는 나만 알지” 하실 분 계시니, 그 분께 그냥 저냥 속 시원히 한참을 떠드는 것, 기도는 그런 게 아닐까?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 보면, 어느새 그게 힐링이고 은혜고, 그게 내 속풀이 한풀이고, 그게 뺑덕어미 로또 당첨되는 일이고, 놀부 대박 터지는 셈이고, 변학도 마침내 춘향이 마음 돌리는 일 아닐까? 그게 기도가 아닐까? 로또든 대박이든, 춘향 맘이든, 그건 사실 하나님 소관이시니, 그대로 해주시고 안해주시고는 다 들으신 뒤 그 분께서 하실 일. 때론 개구쟁이 듬성듬성 이 빠진 듯 진짜 해야 할 말 빼먹기도 하고, 더러는 한 말 또 하고 하더라도, 앞뒤 재지 않고 속 얘기 속사정 탈탈 털어놓는 것, 기도는 그런 게 아닐까? 


실컷 떠들다가 후딱 정신차리고 보니, 이 말 저 말 앞뒤 없이 너무 쏟아내 쑥스럽고, 정작 내 말만 하지 그 분 말씀 전혀 듣질 않으니 그거 죄송스럽고, 그래서 “죄송스럽습니다, 주님, 제 속에 내가 너무 많고, 또 쌓인 게, 쌓아 둔 게 하도 많아 그만. 당신 뜻대로 하실 줄 당연히 알고는 있지만, 혹시나 하는 미련한 마음에 이냥 저냥 떠들어 댔습니다” 라고 미안한 마음 보태고, 하지만 쯧쯧 하시면서도 내 말 다 들으시는 그것이 너무 고맙고 감사한 것. 기도는 그런 게 아닐까?  


이 말 저 말 하다 지치고, 내 말만 하기가 또한 정말 민망해 옆집 외롭고 갑갑한 사정, 힘들고 고단한 그 사정들, 본 대로 들은 대로, 남 얘기하듯 그렇게 하지 않고, “주님, 어떻게 그것도 들어주십시오” 하며 이기적이지 않게 서둘러 말 보태는 것. 좀 여유 가 더 있거든, 아니 여유 좀 더 내서, 좀 더 먼 곳, 저 넘어 강 건너 바다 건너 그 어떤 나라 어제 테레비서 본 얘기하며 “주님, 저들도 사는게 영 어렵고 힘들고 그러던데 그 사람들도 좀 살펴주십시오” 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남 얘기, 남 사정 얘기도 어느새 늘어가고, 그렇게 늘어가다 보면 그게 흔히 말하는 중보기도가 되는게 아닐까? ‘나’라는 주어가 ‘너’로 바뀌는 것, 나 뿐만 아니라 남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 기도는 그런 게 아닐까? 


내 얘기, 내 기도는 점점 줄고, 남 얘기, 남 기도는 조금씩 늘고, 말 하다 지쳐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에 뭐라 하시나 가만히 들을 생각도 좀 하고, 그러다 보면 내 목소리 좀 낮추게 되고, 그럼 그 참에 속 얘기 속으로 조용히 하고, 또 하나님 말씀 듣겠다 입 다물고도 있고, 그렇게 가만 가만 눈 감고 있다 보면 졸기도 하고, 졸다 퍼뜩 정신차려 다시 조용 조용 말하고 가만 가만 듣고, 그러다 나도 모르게 침묵 속에 듣고 말하고 또 듣고, 그러다 보면 그게 어느새 자라나 명상기도, 관상기도 되는,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음을 보고 느끼고 만지는, 기도는 그런 게 아닐까? 




속 시끄럽고 소란스럽지 않은, 무념 무상 속, 깊은 평화 속, 침묵 속, 맑고 조용한 기도,그 고급진(?) 기도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것임을 나 몰라 그런게 아니다. 그런 기도 무시 전혀 할 입장도 처지도 못되고, 나 역시 아직 자라지 못한 그 기도에 물 주고 있다. 다만 가슴 속 그 말 못할 속사정들이 도대체가 없어지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잠도 없는 듯, 오히려 비 온 뒤 쑥쑥 나고 자라는 죽순 마냥 죽자고 덤벼드니, 사실 없는 것 생긴 게 아니고, 있는 것 맨땅 말랑말랑해진 틈 사이로 기어코 나오는 것일 뿐이다. 숨기고 감추며 있는 거 없다 할 수 없고, 프로이트 말 마따나 꿈에라도 비집고 나오니, 일단은 어떻게든 생시에 하나님께라도 솔직허니 속 시원히 그 속 사정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교회라도, 교회 모임이라는 곳에서라도 그 속사정 다는 아니더라도 조금 풀고 내려 놓을 곳 되어야 하지 않을까도 싶어 하는 말이다. 


물론, 별 속사정 없고, 할 속 얘기 그리 크게 없다 하시는 분들, 혹 그 모든 속사정 초월, 초연했다 하실 분들 한테 하는 얘기 전혀 아니고, 물론 그 분들 역시 내 기도 얘기 신경 쓰실 일 없겠다. 맺힌 거 없고 풀 거 없고, 있다 해도 다른 데 따로 그 속사정 말할 데 풀 데 있고 오히려 많다 하신다면 허튼 소리라 무시해도 좋다. 다만, 이렇게라도 기도해야 하는 이들도 있고, 그래야 속 조금이나마 풀리는 사람들도 있고, 그 이유로 교회 찾는 이들도 없지 않고 되려 꽤 많고, 다른 건 몰라도 그런 이유로 새벽기도는 꼭 가는 이들도 있고 있으니, 그 속 헤아리면 좋겠다. 촌스럽지만 이런 속사정, 속 얘기 쏟아내는 기도라도 일단은 먼저 많~이, 맘~껏, 양~껏, 한~껏 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다.  


“하나님 워쩐대유” 그 옛날 나 초딩 시절 우연히 엿들었던 동네 할머님의 기도였다. 보름달 밑에서 사경을 헤매는 손주 위해 두 손 모은 채 울먹이시며 기도하시던 그 할머님은 오직 그 말만 반복하고 또 반복하셨다. 그때 이 말 말고 더 무슨 말이 필요했을까? 그 보다 더 절실하고 아픈 기도는 지금까지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난 그때 기도는 저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었다. 생각해보니 한 번 더 들어 보았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막 15:34)

그리고 여기, 길 위 바디매오도 역시 큰소리로 부르짖는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거리에 나 앉은 신세, 앞 못 보는 불쌍한 우리 바디매오. 이런 저런 그 사정 어찌 구구절절 다 말할까?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 오고 가는 길 위 아닌가. 그래서 지금 이게 냅다 나온 말이요, 외침이다. 그리고 기도다. 앞 보지 못하니 사회 생활 엉망일테고, 경제 사정 뻔할테고, 가정 생활이야 말하나 마나, 물으나 마나 일 테고. 게다가 당시 유대 사회를 볼 때 그나마의 기댈 신앙 생활 역시 제대로 될 리 없고, 오히려 죄인이라고 이리 저리 치이며, 당연히 회당에서도 환영받는 신세는 전혀 아닐 테니. 아무튼 이래 저래 알면 알수록 힘들고 고단하고 갑갑한 삶인데, 그 속 참 얼마나 시끄럽고 시끄러울까? 그러니, 그 속에 가득한 사정들 일일이 말할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누가 들어줄 것 같지도 않고. 그런 그 상황 누구보다 잘 아는 바디매오는 비록 눈은 볼 수 없어도 눈치는 9단인지라 짧고 굵게 한 마디로 모든 속사정 한 방에 털어 놓을 수밖에 없다는 걸 재빨리 간파한다. 사실 그의 이 짧은 외침, 기도, 이 말 밖에 무얼 더 더하고 무얼 더 붙일까? 그의 모든 사정들, 그의 모든 아픔들, 그의 모든 곤고한 삶이 이 짧은 외침 안에 다 들어있다. 이 외침, 이 기도는 바디매오 자신이며 그의 삶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디매오 따라 나도 오늘 조용히 내 속에서 소리없이 외친다. 오늘도 욕심꾸러기처럼 보이기 싫고, 그래서 이것 저것 차마 “다 들어 주소서, 주여” 하진 못하고, 별 수 없는 내가 드리는 촌스러운 기도. 


“주여, 나를 그리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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