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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May 18. 2022

사랑한다면, 나처럼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시(詩)가 되고 길(道)이 되는 예수

함께 읽고 걷는 요한복음서


“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 .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 . .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 . .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 .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 . . ‘내 양 떼를 쳐라.’ . .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 .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 . . ‘내 양 떼를 먹여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서 21:15-19)


photo by noneunshinboo


아침 식사가 끝난 뒤,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차마 주님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베드로에게 먼저 다가가 조용히 물으십니다. 그러나, ‘그땐 너 왜 그랬느냐? 내가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꾸짖지도 책망하지도, 어서 말해보라 다그치지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의 용서는 벌써 있었다, 이미 나는 너를 용서했다,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알려주시려고 물으십니다. 


용서는 먼저하는 사랑입니다. 먼저 손 뻗는 것이 용서이고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가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용서입니다. 용서가 있어 하나님과 나, 나와 너, 그리고 모든 우리의 관계의 회복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자녀 사이, 그리고 형제자매들 사이의 망가지고 부서지고 끊어졌던 사랑의 관계, 그 회복의 시작이 용서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너를 사랑한다’ 하시며, 내 곁을 그리고 내 안을 찾아오셨던 주님을 ‘나는 당신을 모른다’ 했던 나. ‘여기 나를 보라, 나의 말 들어라’ 하셔도, ‘난 싫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외려 다른 것에 눈과 귀 돌렸던 나. ‘나랑 같이 가자’, ‘나랑 같이 있자’ 하셔도, 다른 데에 마음 두고 줄곧 거기에만 있던 나. 그 날 거기 그 어둔 동산, 그 때마저도 ‘지금 내가 죽을 지경이니, 여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하신 당신의 부탁도 들어 드리지 못하고, 저들이 승냥이처럼 몰려와 당신을 끌어가도 그만 무서워 피하고 도망치고, 겨우 정신차려 기껏 당신의 뒤를 쫓아 갔지만, ‘난 저 사람을 모른다’ 부인하고, 또 그 죄책감에 슬퍼 울고, 나 또한 잡혀갈까 머리카락 보일까 꼭꼭 숨었던 나. 

‘그런 너를 나는 사랑한다,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너를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변함없이 사랑한다’ 하시는 그 주님을 베드로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네!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 사랑을 고백할 때입니다. 특별한 날을 기다릴 이유도 무언가를 준비할 필요도 없습니다. 너무 이른 새벽이라도, 늦은 아침이라도, 머리 위 뜬 해가 너무 밝아도, 그리고 잠 못든 늦은 밤이어도 좋습니다. ‘당신이 싫다!’ 도망쳤다 돌아온 직후여도 좋습니다. 나이 들어 고백하는 사랑이 남사스럽고 쑥스럽고, 나이 아직 어려 깊은 사랑 오래하는 사랑 잘은 몰라도 좋습니다. 


춥고 배고픈 나의 몸과 마음이 너무 안쓰러워, 그런 나를 위해 구운 물고기와 빵, 그리고 따뜻한 모닥불을 준비하시고 기다리시는 그 주님. 우선 그 허기와 추위를 먼저 달래라고 이것저것 챙겨주시며 가만히 옆에서 기다리시는 그 주님. 겨우 조금 나의 몸과 마음을 추스린 것을 보시고, 저기 같이 산책을 하자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주님을 사랑합니다.”


곁에서 걸으시며 조용히 나에게 물으시면, 더 이상은 앞뒤를 재지 말고 나의 사랑을 고백해야 합니다. 나의 머리에만, 마음에만 담아두지 말고 나의 입 밖으로 내야 합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사랑한다면, 나처럼. 사랑한다면, 내 양들을 먹여라.” 


주님께서는 그 입 밖으로 나온 사랑이 갈릴리 호수 그 수면 위를 한동안 맴돌다 다시 그 입 안으로 그냥 되돌아가는 헛말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른 아침 여기 갈릴리 호숫가, 당신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아침밥을 차려주신 것처럼, 당신을 사랑한다면, 제자들 또한 세상과 이웃에게 잘 구운 물고기와 빵, 그리고 따뜻하게 피운 모닥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사랑이 아직 당신의 그 크신 사랑에 이를 만큼 자라지 못했다는 것을, 제자들의 사랑이 아직 어리다는 것을, 사랑에 미숙하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사랑에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랑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사랑의 기술’*, 즉 ‘사랑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는 그 사랑을 옆에서 ‘가르치고 돕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라!”**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문을 모두 닫아걸고 숨어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그 ‘숨’이 성령, 곧 사랑의 영, 지혜의 영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은 ‘주님의 숨’, ‘사랑의 숨’, ‘지혜의 숨’을 쉴 것입니다.  


그 성령은 ‘용서의 영’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은 ‘용서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나에게 온 용서를 내 안에서만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으로 흘려보낼 것입니다. 내가 남들에게 잘못한 일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또한 남들이 나에게 잘못한 일들을 용서하는 것, 그것이 성령께서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해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리고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 같이, 주님께서는 비로소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우리의 이웃들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사랑한다면, 나처럼. 사랑한다면, 내 양들을 먹여라.” 



* 사랑의 기술, 그것은 기술(skill) 혹은 도구(tool)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혜(wisdom)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법’, 그 ‘사랑의 지혜’를 가르칩니다. 

** 요한복음서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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