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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May 20. 2022

그리스도의 마음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시(詩)가 되고 길(道)이 되는 예수

함께 읽고 걷는 요한복음서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이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양들의 목자이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자기 양들을 다 불러낸 다음에, 그는 앞서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양들은 결코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고, 그에게서 달아날 것이다. 그것은 양들이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 .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 . .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 . .” (요한복음서 10:1-18)


photo by noneunshinboo


목자가 자기 양들을 알고, 양들은 자기의 목자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목자가 자기 양들을 ‘안다’는 것, 그것은 

철 없던 엄마가 그 뱃속에서 콩알 반쪽에서 3킬로그램 남짓 키워가며 그렇게 10개월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어도 내 아기를 아는 것이 아닐까요?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온 그 아기를 젖으로 눈물로 키우며, 혹시라도 바람에 날아갈까 조심조심하며 그 곁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요? 서운해 할 사이도 없이 어느새 훌쩍 자라 장난스럽게 이젠 엄마를 제 눈높이 아래로 보는 내 아이, 점점 낯설어지는 그러나 여전히 첫 발을 뗀 나의 아기로 아는 것이 아닐까요? 여긴 너무 좁다 세상 밖으로 떠났어도, 그러나 엄마의 품 속에, 엄마의 마음 속에 줄곧 있는 나의 아기로 아는 것이 아닐까요? 저기 산 넘어 바다 건너 있는 자식들이 여기 엄마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엄마의 간절한 기도 속에 있어 그 자식들이 무얼 먹는지 어디 있는지 아는 것이 아닐까요? 


양들이 목자를 안다는 것, 그것은 

내가 누군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내가 이제 어디로 나가는 것인지, 그걸 당연히 알 턱이 없는 엄마 뱃속의 아기, 내가 엄마인지 엄마가 나인지 그렇게 뱃속에서부터 엄마를 아는 것이 아닐까요?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온 아기, 누구의 품인지 모르지만 익숙한 그 심장 고동소리를 자장가로 듣고 그 뱃속을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젠 탯줄이 제 입으로 그 엄마가 먹은 것을 뺏어 먹으며 엄마를 알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나 혼자 나가겠다고, 그러나 엄마는 아직은 아니라고 그렇게 옥신각신하면서도 엄마가 예쁘게 쳐 놓은 울타리 안에서 좋아라 놀면서 또 그렇게 엄마를 아는 것이 아닐까요? 먹고 사는 게 바쁘고 세상살이 버텨내는 게 힘들어 이리 치이고 저리 휘둘리다 지나친 동네 빵집 생일케익에 서둘러 휴대폰 꺼내 엄마 생일 아는 체 하는 것이 아닐까요? 실직해서, 실연해서, 실패해서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아파서 누우면, 저기 엄마의 마음이 몸져누워 더 아프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목자가 양들을, 양들이 목자를 아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목자는 양들에게 속하고, 양들은 목자에게 속하는 것, 그것이 서로를 아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 심는 여자

자식 우는 쪽으로 

모가 굽는다* 


5월입니다. 여기 한 여자가 논에 모를 심고 있습니다. 곤궁한 살림에 어디 아기를 맡길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대신 봐줄 사람도 없습니다. 뭐가 불편했던지 아기는 밤새 울었습니다. 이른 아침 엄마가 구해 온 보리 조금, 쌀 몇 톨, 그리고 푸성귀로 끓인 희멀건 죽을 먹고도 아기가 울음을 그치지 않아, 이젠 말라 나오지도 않는 엄마 젖을 물려주었더니 아기는 조금 빨다 조금 전에 겨우 잠이 들었습니다. 다행이다 싶어 엄마는 저기 멀리 보이는 논둑, 거기에 포대기를 깔고 아기를 눕혀 놓고, 지금 여기 다른 엄마들과 함께 모를 심고 있습니다. 그 논둑 위에는 여기 모 심는 엄마들의 그 수만큼 아기들이 누워 있습니다. 아기들 몇은 곤히 잠이 들었고, 몇은 이미 잠이 들락말락 합니다. 또 어떤 아기는 이미 잠이 깬 모양입니다. 말똥말똥 금방이라도 울 기세입니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논의 물, 발이 푹푹 빠지는 그 논 한가운데, 엄마들의 몸은 비록 할 수 없이 여기 있지만, 그 엄마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저기 논둑 위에 자고 있는 자기 아기의 곁을 차마 떠나질 못합니다. 몸은 여기에 있고, 마음은 저기에 있습니다. 눈은 여기에 있고, 귀는 저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풀벌레가 물었는지 한 아기가 갑자기 소스라치게 울기 시작합니다. 그게 무슨 100미터 달리기 출발신호라도 되는 줄 아는지, 너도 나도 따라 울기 시작합니다. 


“내 아기일까? 아님, 옆집 새댁 아기일까? 누구 아기가 우는 걸까?”


그러나, 누구 하나 모심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멈출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모심기를 끝내야 합니다. 오늘 중에 여기 모심기를 마쳐야 내일은 다른 논에 모심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이 보릿고래를 넘고, 긴 장마도 넘고, 한여름 뜨거운 태양빛도 넘어 가을이 오면 그나마 많지 않은 흰쌀밥에 아기 먹일 젖이라도 어떻게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그 길고 긴 겨울을 자식들하고 겨우 지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손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엄마들의 그 마음을 아는지, 모 심은 줄이 점점 엄마들도 모르게 아기들이 우는 쪽으로 무지개처럼 휩니다. 제대로 하늘을 향해 꼿꼿이 심었다 했는데, 심은 모들이 죄다 아기들이 누어 있는 쪽으로 비스듬히 누웠습니다.


엄마의 마음입니다. 목자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자식들을 향해 눕는 엄마의 마음, 양들을 향해 굽는 목자의 마음, 당신의 자녀들을 향해 뻗는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나 이제 다 컸다’, ‘나 혼자 할 수 있다’ 하며 그 엄마의 마음, 그 목자의 마음, 그 주님의 마음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그러나 엄마에게는 겨우 젖을 뗀 자식들이고, 목자에게는 겨우 딱딱한 풀 먹을 줄 아는 어린 양들이고, 주님께는 겨우 그 십자가 사랑 조금 아는 철없는 자녀들일 뿐입니다. 

점점 멀어지는 거리 그만큼 엄마는, 목자는, 그리고 주님은 염려와 사랑으로 더욱 아픕니다. 언제나 엄마는 그 자식 안에, 목자는 그 양들 안에, 주님은 그 자녀들 안에 줄곧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 안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양들이, 자녀들이 떠나갔어도, 차마 떠날 수 없는 마음. 엄마와 목자와 주님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저들 안에 있고, 마음이 저들에게 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 . .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요한복음서 15:4)


내가 주님을 안다는 것은 내가 주님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내 안에 머물러 계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 주님께서는 나에게, 그렇게 서로에게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속한 사이가 된다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 일본의 하이쿠 시인 잇사의 시. 류시화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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