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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May 25. 2022

누가 나를 그 물에 넣어줄까? (1)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시(詩)가 되고 길(道)이 되는 예수


함께 읽고 걷는 요한복음서 

 

“. . .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주랑이 다섯 있었다. 이 주랑 안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예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다. ‘낫고 싶으냐?’ . . .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 . .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요한복음서 5:1-9)

 

photo by noneunshinboo


‘내 코가 석 자’라는 우리말 표현이 있습니다. 

“지금 내 코가 석 자야.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내가 지금 누구 사정 생각하고, 누구 사정 봐주라고 그러는 거야?” 


사실, 우리는 늘, 너 나 할 것 없이, ‘내 코가 석 자’입니다.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 싶어도, 조금 살만 해졌다 싶어도, 우린 여전히 ‘내 코가 석 자’인 채로 살아갑니다. 내 코에 나의 눈은 고정되어, 남들의 코가 얼마나 긴지 짧은지는 영 나의 관심 밖에 일입니다. 설사 관심이 있다 해도, 나의 가족 정도일 것입니다. 오지랖이 넓다해도 기껏해야 내 주변의 아주 친한 친구 몇 명의 코 정도가 보일 뿐, 그것도 나보다는 한참 짧은, 겨우 몇 센티미터 정도의 코로 보일 뿐입니다.  




석 자, 90센티미터가 넘는 긴 코를 갖고 있다면, 세상 살기는 여간 힘든게 아닐 것입니다. 코끼리의 그 긴 코는 그나마 손 역할을 하니 다행이지만, 우리 코가 만약 그렇게 길다면, 외모가 이상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얼 제대로 먹지도 못할 것이고, 어디 똑바로 눕지도 못할 것이고, 그리고 심지어는 바로 걷지도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쿵 저기에 쿵 부딪혀 아프고, 이 사람 저 사람 코에 닿고 찔려 쓸리고 따갑고, 혹시라도 많은 사람들이 몰린 지하철이나 버스 안이라면 여기저기 상처나기 일쑤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긴 코를 한 우리는 좁은 곳,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은 너무 불편하고 또 불안할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서 있을 넓직한 곳이 필요하고, 높은 곳에 올라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훨씬, 적어도 몇 발은 항상 앞서 가야 합니다. 빨리 걷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달려야 합니다. 도움닫기도 해야 하고, 장대를 들고서라도 더 높이 뛰어야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늘이라도 날아서 저기 멀치감치 앞서 가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내가 첫 번째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제일 먼저가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점점 달리기 경주가 되고, 우리는 세상을 올림픽 경기장으로, 나아가 전쟁터로 살아갑니다. 사는 게 여간 힘겹고 고달프고 치열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여간 외롭고 쓸쓸고 고단한 게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내 코가 석 자’인 채로 사는 것이 힘겨워 교회를 찾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나마 그런 치열한 삶을 잊고 싶고, 그런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줄을 단박에 끊지는 못해도 조금은 느슨하게 하고도 싶고, 위로와 위안,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어 찾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교회 밖을 나서자마나 어느새 우리는 다시 ‘내 코가 석 자’인 사람으로 되돌아가 다시 그 삶의 치열함 속으로 들어갑니다. 




여기 ‘베데스다’ 그 ‘못’ 주변에 모인 사람들 역시 ‘내 코가 석 자’인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석 자가 훨씬 넘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아프고 고달픈 삶, 아픈 것이 죄이고, 슬퍼 우는 것이 죄이고, 무엇이 없는 것이 죄이고, 배우지 못한 것이 죄이고, 이방인으로 사는 것이 죄인 사람들. 그런 죄인으로 사는 이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제대로 ‘내 코가 석 자’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지긋지긋한 삶에서 제발 벗어나기 위해, 저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들보다 먼저 내가 베데스다, 그 물에 들어가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내가 누구보다 먼저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도 안 되면, 사람을 사서라도 어떻게든 내가 그 물에 들어가는 첫 번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병이 낫든 말든, 죄에서 벗어나든 말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 베데스다는 거룩하고 성스러운 곳이라 하기에는 너무 가혹하고 냉혹한 삶의 현장, 치열한 삶의 현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면에서는 오늘 세상의 모습과 닮은 듯 보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 거기를 지나가시다가 거기 모인 많은 ‘내 코가 석 자’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십니다. 그렇게 자리보전하고 누워 꼼짝도 못하고 있은지가 38년이나 되었다는 것도 아십니다. 38년이면 당시의 평균 수명으로 한평생이 넘는 세월입니다. 




“네가 낫고 싶으냐?”


조금은 답답한 질문처럼 느껴집니다. 당연히 낫고 싶겠지요, 그러니 여기에 어떻게든 왔겠지요. 그 누구보다 간절하고 절실하겠지요. 그런데, 다 아신다는 주님께서는 왜 그렇게 물으셨을까요? 어떤 대답을 기대하셨길래, 그렇게 물으셨을까요? 무엇을 더 알고 싶으셔서 그렇게 물으셨을까요? 의사가 찾아온 환자에게 ‘낫고 싶으세요?’라고 묻는 것처럼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네 선생님, 그렇지만 저에겐 물이 움직여도, 그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혼자 거기까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그 물에 들어갑니다.”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누가 나를 이 물에 넣어줄까? 맨 먼저 이 물에 들어갈 수 있게, 오늘은 누가 나를 도와주지 않을까?’ 그렇게 혹시나 하며, 밤이나 낮이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픈 몸, 지친 마음 끌고, 기어서 굴러서 여기를 찾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가 날 좀 들어 넣어주시오!’ 해도 어느 누구 대답하지 않고, ‘어디 그런 사람 있을까?’ 둘러봐도 모두 고개를 돌립니다. ‘맨 먼저는 아니라 하더라도, 한 번만이라도 저기 물 안에 들어나 가 봤으면 좋겠는데, 남들 다 들어갔다 나온 뒤, 혹시 그 끝물에 내가 덤으로라도 얻어 걸릴지 모르니, 제발 누가 나에게 자비를 좀 베풀어 주었으면. . .’ 온통 그런 생각뿐이었습니다. 어디 다른 곳을 찾아 갈 생각은 애당초 하지도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구길래, 병자인 나에게 그런 답답한 질문을 하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나에게 또 그런 명령을 하는 것일까? 


photo by noneunshinboo


“누가 나를 들어 이 물에 넣어줄까?” 


일생을 두고 나를 따라다녔던 이 질문, 평생을 두고 내가 쫓았던 이 질문. 하지만, 설사 그 물에 한 번 들어갔다 해도, 또 들어가고 싶고, 두 번이든 열 번이든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 물에 족족 들어가고 싶은 것이 세상 사는 우리인데. 밥 먹고 돌아서면 금방 배고픈 나이가 지나도 한참을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 하는 것이 우리의 욕심인데. 하늘을 날지 못하면 뛰어서라도, 빨리 뛰지 못하면 걸어서라도, 제대로 걷지 못하면 기어서라도, 그것도 안 되면 굴러서라도 내가 먼저 들어가자, 하는 우리의 세상 인심인데. 그렇게 모진게 우리의 삶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인데. 그런데, . . . 


“일어나, 네 누웠던 자리를 들고, 가라!”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그런데, 그 즉시 그 사람의 병이 나아, 그 사람은 자기가 누웠던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고 사도 요한은 전합니다. 베데스다 못, 그 물 한방울 뭍히지도 않았는데. 발끝 하나, 손끝 하나, 그 물에 채 닿지도 않았는데. 때때로 내려온다는 그 천사들은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는데. 그리고 베데스다의 수면은 저리도 잠잠하고 오히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너무도 잔잔한데. 


도대체 여기 베데스다 못 가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왜, 무슨 이유로, 주님께서는 그 수 많은 병자들 중에서 이 사람을 택하셨을까요? 그리고 그 누워 있는 것을 보셨고, 또한 이미 모든 것을 아셨던 주님께서는 왜 그 사람에게 굳이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셨을까요? 왜 그 안타깝고 비참한 사정을 굳이 본인 입으로 말하게 하셨을까요? 주님께서는 이 사람이 정말 간절하고 절실하게 그 병에서 놓여나고 싶어하는지 그걸 알고 싶으셨을까요?


그렇지만, 거기 베데스다에 모인 사람들 중에 간절하고 절실하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거기 구경나온 사람들을 빼고, 자기 ‘코가 석 자’가 아닌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절실히 원하는 그 무엇이 없고, 간절히 기다리는 그 누구가 없는 사람, 그런 인생이 과연 있을까요? 거기 베데스다에 모인 사람들이나, 여기 저를 포함해 우리들 중에 ‘내 코가 석 자’가 아닌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택하셨을까요?  


하루가 멀다 하고 베데스다 못을 찾을 정도의 열심과 꼭 낫고자 하는 간절함,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주님께 나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맡기는 의심 없는 믿음, 그런 굳고 깊은 소망과 믿음의 사람이라서,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하고 진실하고 경건한 사람이라서, 그를 택하셨을까요? 그것을 알아보시기 위하여 시험하셨고, 이제 그걸 확인하셨기 때문에, 그를 고쳐주신 것일까요?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 사람이 우리가 상상하는 딱히 그런 사람과는 거리가 조금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이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이 병이 나은 사람에게 말하였다. ‘오늘은 안식일이니,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옳지 않소.’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나를 낫게 해주신 분이 나더러, ‘네 자리를 들고 가라’ 하셨소.’ 유대 사람들이 다시 물었다. ‘그대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한 사람이 누구요?’ 그런데 그 병 나은 사람은, 자기를 고쳐 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자기를 고쳐 주신 분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안식일의 규칙을 어긴 것 때문에 자신이 곤란을 당할까 싶어, 외려 그 분을 핑계 삼고 자기는 빠져나가려 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38년간 앓아오던 병이 나은 이 사람에게서는 주님께서 그를 선택하신 이유를 딱히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이유 없는 자비’입니다. 주님의 그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거기 그 사람에게서, 그리고 여기 여러분과 저에게서 그 하나님의 자비, 그 자비의 이유를 찾아 아무리 샅샅이 헤짚고 찾아도, 내 안에서 그 주님의 사랑, 그 사랑의 조건을 찾으려고 아무리 겉옷과 속옷을 이 잡 듯 뒤져도, 그 이유와 그 조건을 우리 안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 없는 자비’, 그 ‘조건 없는 사랑’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고, 주님의 은혜입니다. 나에게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이유가 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이유가 되십니다. 내가 그 어떤 조건을 충족시켰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신 것, 그것이 유일한 조건입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 마가복음서 2: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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