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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May 27. 2022

누가 나를 그 물에 넣어줄까? (2)

노는(遊)신부의 더 드라마, 시(詩)가 되고 길(道)이 되는 예수


함께 읽고 걷는 요한복음서 


“. . .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주랑이 다섯 있었다. 이 주랑 안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예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다. ‘낫고 싶으냐?’ . . .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 . .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요한복음서 5:1-9)


photo by noneunshinboo


“선생님, 그런데 나를 이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로, 나를 그 물에 넣어줄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로, 가난한 사람들, 우는 사람들,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주인 없는 양들처럼 빈 들을 헤매는 사람들, 그 한가운데로, 우리와 같은 한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 주변, 삶이 고달프고 힘겨운 사람들 속으로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것입니다. 


직접 나를, 우리를 그 물에 넣어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에 때때로 내려와 물을 흔들어놓고 올라간다는, 알지도 못할 천사로 오신 것도 아니고,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런 어떤 기적이나 일으키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초자연적 현상,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현상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곳이 물웅덩이가 되었든, 커다란 못이 되었든, 자연경관이 수려한 호수가 되었든, 그런 곳에, 그런 물에 우리를 넣어주겠다, 오신 것이 아닙니다. 

희생 제사에 쓰일 양들이 드나드는 문, 그 양들을 씻는 그 베데스다 못이 아예 되시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또한 그 물은, 우물가 그 사마리아 여인이 건네주는, 마시고 또 마셔도 다시 목이 마르는 그런 물이 아닙니다. 지금 주님께서 나를 넣어주실 그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이며, 그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물입니다. (요 4:14) 그리고 그 물은 사도 요한이 환상 속에서 보았다는, 바로 그 수정과 같이 빛나는 생명의 강물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와서, 하나님의 도성, 그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강 양쪽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가 있어, 달마다 열매를 내고, 그 나뭇잎은 모든 민족들을 낫게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22:1-2)


그 생명의 물이 흐르는 강, 그 생명의 강이 바로 ‘참 베데스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참 베데스다’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 은혜의 강, 구원의 강, 그 주님의 사랑 그 안으로 내가 들어가는 것이고, 주님의 그 사랑이 나의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고, 또한 하늘로부터 흘러 나오는 그 축복의 강물이 내 안에서 멈추지 않고, 나를 통하여 내 이웃으로 내 주변으로 계속 흘러가야 합니다. 




‘누가 나를 이 물에 넣어줄까?’ 자리에 누워 주위를 두리번거렸던 그 사람은, 그러나 그때 거기 베데스다 못 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 우리 옆에, 우리 주변에, 우리 이웃 가운데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 주님의 은혜의 강물, 그 구원의 강물이 흐르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 ‘누구 나를 들어 저 물에 넣어줄 사람 어디 없나’ 두리번거리는 그 사람을 생명의 강이신 주님께 들어 넣어주는 그 누구,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 . .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 .” (빌립보서 2:5-11)


그리스도의 마음, 우리가 간직하고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내가 먼저’라는 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구원의 강물에 ‘다른 사람을 넣어주는’ 마음입니다.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십자가 위에서 조롱을 받으신 그 ‘십자가의 마음’입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그리고 참 베데스다인 그리스도 예수, 그 은혜와 사랑과 구원의 강가에 모인 그리스도인들은 그 강물에 내 한 몸 담그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힘 없이 고개 숙인 채 내 곁에 서 있는 사람, 홀로 아파 저기 누워있는 사람, 거기 누구 없나 슬픔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그 사람을 그 강물에 들어 넣어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강물에 그 사람을 들어 넣어주다보니 어느새 나 또한 그 강물 안에 들어와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구원,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강, 그 생명의 물줄기는 누가 맨 먼저인지 그리고 누가 맨 나중인지 그 순서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 생명의 강물은 우리 모두에게 흘러 들어와 가득 채우고 넘칠 것이고, 우리 모두는 함께 그 강물 속에 헤엄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강물을 따라 더 넓고 깊은 영원한 생명의 바다, 무한한 바다, 그 하나님 나라에 우리 모두는 함께 이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것이고,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드리는 이유이고, 그 기도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 생활의 중심이 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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