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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Sep 15. 2022

내가 아는 길

사도행전, 그리고 교회다움* (15-1)

“그런데 알렉산드리아 태생으로 아볼로라는 유대 사람이 에베소에 왔다. 그는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주님의 '도'를 배워서 알고 있었고, 예수에 관한 일을 열심히 말하고 정확하게 가르쳤다. 그렇지만 그는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하였다.” (사도행전 18:24-25)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에, 바울은 높은 지역들을 거쳐서, 에베소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는 몇몇 제자를 만나서,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바울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바울이 말하였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했는데,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사도행전 19:1-7)


1.        

여기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아볼로(Apollos)가 성경에 대한 지식도 많고 학식 또한 훌륭하여 토론에도 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도(道)에 대해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또한 정확하게 그리고 열심히 가르쳤다고 전합니다. 그렇지만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했다’ 라고 누가는 말합니다. 스테반이나 바울을 소개할 때에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다’ 라고 했던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맞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사람입니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주었던 사람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러나 오실 그분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며, 지금 내가 주는 이 회개의 세례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길, 우리가 그분께로 가는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나는 그분이 오실 그 길을 위해 여기를 우리를 쓸고 닦고 치우고 버리는 것이다, 나는 그 길을 예비하는 것일 뿐, 나는 당신들이 오시길 고대하던 메시아도 아니고, 구원자도 아니다, 나는 그분이 아니다, 나는 그 길이 아니다.” (눅 3:4-6, 16) 


그런데, 아볼로는 그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볼로는 요한에서 멈추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인데, 그 손가락에서 좀체 눈을 떼질 못하는 아볼로입니다. 알긴 아는데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2.        

사도 바울이 묻습니다.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럼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요한의 세례입니다.”


그런데 한 둘이 아닙니다. 거기 오도가도 않고 멈추어 선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19:4)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회개는 옛길의 떠나는 것, 줄곧 가던 옛길 그 길 위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한 그 출발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볼로를 비롯해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 출발선에서 맴도는 사람들입니다. 출발 신호는 예전에 떨어졌는데, 여전히 몸만 열심히 풀고 있습니다. 알기는 아는데, 믿기는 믿는데, 뭔가 여전히 어정쩡해 보입니다.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고, 그래서 성령이 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아직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그 주님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 채, 저기 요단강가의 요한에서 멈춘 사람들입니다. 회개에서 멈추었습니다. 옛 길에서는 멈추었는데, 아직 새 길을 걷고 뛰고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부는데, 돛은 올리지 않고, 거기 항구에 닻을 내린 채로 있습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그들에게 주님은 우리 가운데 오셨던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하늘에 오르시어 지금은 아버지 하나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당신의 영으로 여기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도 계시는데, 그것을 모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아직 먼 훗날에 들어가야 할 나라, 그래서 지금은 어딘가에서 멈추어 그대로 있는 나라입니다. 여기 내가 지금 살아가야 할 나라가 아닙니다. 미래형의 나라일 뿐 현재형의 나라는 아닙니다. 

그들에게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 땅 위에서는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고 멈춘 채로 있고, 거기 하늘 위에 있는 사랑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오순절은 오지 않았고, 그들의 시선은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의 뒷모습만을 쫓고 있고, 거기 빈 하늘만 그들의 가슴에 있습니다. 


3.        

‘주님의 도(道) (the Way of the Lord)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길, 내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 그래서 내가 걷고 살아야 할 ‘길’이신 그리스도, 그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이 말한 오실 그 분, 그 길, 그 메시아가 바로 나사렛 예수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그 예수께서 바로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설명하고 증명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내가 그 길을 잘 알고, 그 길을 남들에게도 가르쳐주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길이 나의 걷는 길, 내가 사는 길이 되지 않으면, 그 길은 나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길은 그림 속 풍경으로 남아 있어,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있는 길일 뿐입니다. 


‘길’은 내가 걸을 때 비로소 나에게 ‘길’이 됩니다. 그 길에 나의 발이 닿아 나의 발에 상채기도 나고 굳은 살도 박히고, 그 길에 내 발자국이 찍히고, 그래서 그 길이 내 가슴에 찍힐 그때에 비로소 그 길은 나의 길이 됩니다. 내가 그냥 아는 길이 아닌 내가 걷는 길이 됩니다. 길을 아는 지식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다시 발로 내려오는 그때, 나는 길을 머리로만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 길을 가슴으로 받아 나의 발로 밟아 느껴 아는 사람, 즉 길을 걷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의 길, 그 길에 대한 지식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고, 다시 가슴에서 내 손과 발로 내려와 잡고 만지고 걷고 뛸 때, 주님의 도, 예수 그리스도의 길, 그 복음은 내가 걷는 길, 내가 살아가는 길이 됩니다. 


4.        

그러나 그 길은 만만치 않은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죽으러 가는 길이 쉬울 수 없습니다. 나를 비우고 나를 포기하는 길이 수월할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함께 가자 하시는 그 길은 그래서 사람들이 찾는 길이 아닙니다. 조금 가다 그만 멈추기 쉽상입니다. 흙먼지로 가득한 길이고, 돌맹이들이 구르고 돌무더로 쌓인 길이고, 온갖 잡초와 넝쿨이 무성한 길입니다. 가을도 아닌데 떨어진 낙엽들로 덮인 길이고, 지난 겨울 내려와 쌓인 눈이 채 녹지 않은 길입니다. 여기가 길이었던 적이 있었기는 했나, 과연 몇 명이나 이 길을 걸었을까 싶은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회개에서 그만 멈추기 쉽습니다. 죄 사함을 받는 요한의 세례에서 멈추기 쉽습니다. 요단강가에서 그만 자리를 깔기 쉽습니다. 그래서 거기 길에서 멈춘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지금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 보며 그건 아니다 아니었다, 그래서 멈추었는데. 그래서 이제는 다른 길로 가야 할 텐데. 그러나 막상 그 길에 들어선다 생각을 하니 그 끝까지 갈 자신도 없고 용기도 없는 것이 솔직한 우리입니다. 그냥 다시 돌아가면 안 될까, 여기 계속 있으면 안 될까, 꼭 가야 할까, 하는 우리입니다. 모르고 사는 게 더 좋았어,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필요하고, 그러니 회개가 필요하고. 그래서 알고 지은 죄 뿐 아니라 모르고 지은 죄 또한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매일 기도하는 우리입니다. 사실은 알고 싶지 않은 죄이고, 나도 남도 몰랐으면 하는 죄이고, 그냥 모르는 척 지었다 하고 실수로 그랬다 하고 싶은 죄이고, 염치없고 송구하지만 그래도 한없는 자비로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만은 놓치고 싶지 않은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를 구하고 또 자비를 구합니다. 그렇게 회개는 회개로 이어지고, 어제의 회개와 오늘의 회개가 거기서 거기가 되어 가고, 그러다보면 어제와 오늘이 닮아 가고, 내일이 오늘과 닮아 갑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회개는 쌓이고 갈 길은 멀고. 그렇게 나의 회개는 버릇이 되고 습관이 되고 관성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내가 주님께 구하는 용서, 그리고 주님께서 아낌없이 주시는 용서는, 그 은혜는 점점 나에게는 가벼워지고 손쉬워지고, 그래서 그리 귀할 것 없는 선물 아닌 선물이 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주님의 은총은 나에게 메마른 단어가 되어 더 이상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지도 않고,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지도 않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용서, 주님의 사랑, 그 한 없는 은혜에 내가 감사의 눈물을 흘렸던 때가 언제였나, 기억에 가물거리고. 어느새 나의 마음에, 우리의 신앙에 먼지가 앉고, 거친 돌들만 굴러다니고, 잡초와 이끼가 끼고 낙엽이 쌓인 길 위에 눈까지 덮여가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스도 예수, 나의 주님이 내가 걷는 길이 되지 못하고, 그냥 내가 아는 길, 내가 알았던 길, 그래서 누구 붙잡고 설명은 할 수 있지만 막상 그 길을 걸어본 지가 너무 오래여서 추억처럼 기억속의 얘기만 나누는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안되는데, 신앙이 지금 여기 내가 걷는 길이 아닌, 그저 누군가와 나누는 추억이 되고 함께 더듬는 기억이 되어가서는 안되는데, 점점 나는 메말라가는 것은 아닐까요?  


* '사도행전, 그리고 교회다움' 시리즈입니다. 29번째 글을 먼저 올립니다. 이전 글들 역시 계속해서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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