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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Sep 22. 2022

나의 달려갈 길

사도행전, 그리고 교회다움 (16-1)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0:22-24)


1.        

“외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고 어젯밤 시골 삼촌한테서 연락이 와서, 외할머니한테 며칠 갔다 온다. 몇가지 반찬 해서 냉장고 아래칸에 넣어 놨다. 전기밥솥은 버튼만 누르면 되고, 국은 한 번씩 먹을 만큼 나눠 냉동실에 얼려놨다. 큰 애는 도서관에서 공부한다는 핑계로 친구들하고 밤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고 일찍 좀 들어와 동생들 좀 챙겨라. 둘째는 학원 빼먹고 게임하다 걸리면 내 손에 죽는다. 그리고 막내는 언니 오빠한테 꼬박꼬박 말대꾸하다 매를 벌지 말고 말 좀 듣고. 그리고 엄마가 부탁하는데, 엄마 없는 동안 제발 좀 싸우지들 말고, 아무나 문 열어주지 말고. 택배 올 것은 없으니까 누가 벨 눌러도 대답할 필요 없다. 세탁기 돌려놨으니까 끝나면 꺼내서 베란다에 널어라. 안 그럼 냄새난다. 무슨 일 있으면 엄마나 아빠한테 전화하고. 무슨 일 없어도 전화하고. 엄마가.”


지난 밤, 시골에 계신 외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는 외삼촌의 전화를 받은 엄마는 밤새 뒤척입니다.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 꼭 올 필요까지는 없다 했지만, 엄마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엄마는 엄마의 엄마가 걱정입니다. 엄마의 마음은 이미 그 엄마가 계신 시골 집에 가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또 여기 남아 있을 자식들이 또한 걱정입니다. 그리 먼 길을 가는 것도 아니고, 그리 오래 가 있는 것도 아닌데도 엄마는 엄마 없이 자기들끼리만 있을 자식들이 걱정입니다. 엄마는 그렇습니다. 우리의 엄마는 늘 그렇습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2.        

여기 먼 길을 떠나는 바울 사도가 있습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갈 4:19)


바울은 우리가 아는 그냥 예수님의 사도가 아닙니다. 엄마입니다. 

해산의 고통을 겪은 엄마, 그리고 그 고통을 마다 않고, 다시 그 해산의 고통을 겪고 또 겪는 엄마입니다. 


“이제 나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먼 길을 떠나기 앞서 자식들을 불러모은 바울 사도가 지금 가려는 곳은 예루살렘입니다. 매년 가진 못해도,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가고 싶은 곳, 가야 하는 곳, 예루살렘. 우리의 위대한 왕, 우리의 기름부음 받은 왕, 우리의 영원한 메시아 다윗왕이 세운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 거기 하나님의 도성 그 한가운데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곳 예루살렘 성전.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사는 곳 예루살렘을 향해 먼 길 떠나는 바울 사도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포스트잇에 몇 자 적어 냉장고 문짝에 붙여 놓고 떠나기엔 바울에게 할 말이 너무 많습니다. A4 몇 장으로도 부족합니다.  


“장로들이 오니, 바울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내가 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은 첫날부터, 여러분과 함께 그 모든 시간을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잘 아십니다. 나는 겸손과 많은 눈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또, 유대 사람들의 음모로 내게 덮친 온갖 시련을 겪었습니다. 나는 또한 유익한 것이면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전하고,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여러분을 가르쳤습니다. 나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똑같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과 우리 주 예수를 믿을 것을, 엄숙히 증언하였습니다.” (행 20:18-21)


사람들은 바울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전엔 어떤 사람이었었고, 그리고 지금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그가 왜 그들을 찾아 그 먼 길을 왔고, 그들과 함께 어떻게 지내왔는지, 그리고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도 이 사람들을 잘 압니다. 이들이 유대인으로 혹은 이방인으로 전에 어떻게 살아 왔었는지, 그리고 바울이 온 이후로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이젠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살려고 하는지 바울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압니다. 


3.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v. 22)


지금 성령에 매여서 가는 길입니다.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거기 예루살렘에서 자기에서 무슨 일이 닥칠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정작 바울 사도는 모릅니다.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잘 압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성령께서 알려주셨습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v. 23)


기왕에 알려주시려거든 그 피할 길도 알려주실 것이지. 아니, 피할 길을 알려 주실 필요도 없이 아예 그 길로는 가지 말라고 하실 것이지. 혹시나 바울이 뭣도 모르면서 가려고 하면 가지 못하게 막으실 것이지. 아니면, 그 길로 가라고 하실 거면, 꼭 가야할 길이라면, 언젠가 바울이 갇혔던 그 감옥 문을 활짝 여신 것처럼, 바울의 손과 발에 채워진 그 수갑과 차꼬를 풀어 주신 것처럼 거기서도 내가 열어주고 풀어주고 하겠다, 그렇게라도 말씀하실 것이지. 

‘네가 어디를 가든지 투옥과 환난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묻지도 않았는데 굳이 일러주실 까닭이 무엇일까요? ‘모르면 약이고, 아는 게 병’이라고, 굳이 그걸 왜 미리 일러주셨을까요?  


photo by noneunshinboo


4.        

“너는 네가 가는 그 어느 도시에서든지, 너를 향한 미움도 증오도 있을 것이고, 쫓겨다닐 것이고, 그러다 잡혀 돌에도 맞을 것이고 매도 맞을 것이고, 나아가 감옥에도 갇힐 것이고, 그러다 죽을 것이다.” 


풀어보면 결국 이런 말입니다. 이건 먼 길 떠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악담입니다. 오히려 저주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성령께서 그저 그냥 하신 말씀, 빈 말씀이 아닙니다. 정말 그렇게 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바울의 삶이 딱 그랬습니다. 그건 바울도 알고, 바울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면 다 압니다. 그런데, 바울의 앞으로의 삶이 예전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진 않을 것이라고 성령께서 일러주십니다.  


“이제 불행 끝, 행복 시작. 그 동안 고생 참 많았으니, 앞으로 너는 꽃길만 걸을 것이다.” 


빈말이라도 한 번쯤은 이러실만도 한데. 그럼 거짓인 줄을 알면서도 힘을 좀 내어 볼 텐데. 걸어보니 꽃길이 아니네, 하면서도 젖먹던 힘 내어 좀더 걸어 갈 텐데. 참 해도 너무 하십니다. 때론 솔직함이 병이 되고, 진실이 나를 아프게 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떠나는 사람만 그런 어려움과 아픔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 남아 있는 사람에게도 떠나보내는 사람에게도 같은 어려움과 아픔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 . .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 떼를 마구 해하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바로 여러분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이탈시켜서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vv. 29-30)


지금 먼 길 떠나는 나에게도 그리고 지금 여기 남아 있는 너희에게도 사나운 이리떼들이 몰려 올 것이라고. 주님의 영께서 바울과 제자들을 통해 세우신 주님의 교회, 주님의 사람들 가운데로 사나운 이리들이 들어올 것이라고. 들어 와서는 주님 양들을 마구 해칠 것이라고 하십니다. 떠나는 사람이나 남아 있는 사람이나 그 있는 곳은 달라도 그 닥칠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기나 여기나 박해와 고난은 있다는 것입니다. 굳이 그걸 일러주시는 성령이십니다. 이 정도면 과잉 친절이고, 지나친 배려이고, 너무 과한 정보(too much information)입니다. 굳이 그걸 미리 알려주실 필요가 있으셨을까요? 사실 이런 기도 응답은 감사라기 보다는 오히려 부담입니다. 나를 부대끼게 만듭니다.  


5.        

그런데, ‘나 이제 먼 길 떠난다’며 사랑하는 사람들 불러놓고 아픈 말을 하는 장면이 여기가 처음이 아닙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마 10:16ㄱ) 

“. . .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고,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겨줄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왕들과 총독들 앞에 끌려갈 것이다. . . . 너희의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줄 것이요, 너희 가운데서 더러는 죽일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눅 21:12-17)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모래 결혼식이 코 앞인 이쁜 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 딸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의 너의 인생에는 행복 넘어 또 행복이, 작은 행복 넘어 더 큰 행복이 이어지고 이어질 거야. 너에겐 어떤 아픔도 슬픔도 실패도 실망도 좌절도 걱정도 근심도 불안도 없이, 지금 이 다이아몬드 반지처럼 변함 없이 영롱한 사랑, 아름답고 찬란한 사랑이 영원할 거야.” 


그런데, 정말 딸을 사랑한다면 마냥 그렇게만 말할 수 있나요? 우리의 삶이 정말 그럴 수만 있나요? 너는 마냥 행복만 할 것이다, 사랑만 할 것이다, 그래서 너는 마냥 꽃길만 걸을 것이다, 그렇게만 말할 수 있나요?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신앙의 여정이 마냥 그럴 수만 있나요? 

그때 거기 바울도 알고 그 사람들도 알고, 그리고 지금 여기 우리도 잘 압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 그럴 수만은 없다는 것,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삶이고 신앙이라는 것을. 


6.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로마 군인들과 성전 경비병들에게 잡혀가시기에 앞서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빕니다. 나는 세상을 위하여 비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하여 빕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 . .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 . .” (요 17:9-19)


“당신께서 나에게 주신 이 사람들. 아버지께서 너무 사랑하신 이 사람들. 그래서 아들인 나를 보내시어 당신께서 저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되라고 보내셨던 이 사람들을 떠나,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 주십시오. 여기 이 땅에 남겨 놓겨둔 채 당신께로 가오니, 저들을 악한 자들로부터 지켜주십시오. 지금은 저들이 나와 함께 가진 못하지만, 나중에 다시 돌아와 아버지께로 모두 데려가려고 하오니, 아버지께서 돌보시고 지켜 주십시오.” 


사랑하는 자식을 두고 먼 길을 떠나는 엄마의 마음, 그리고 엄마의 기도입니다. 


“목자인 내가 없는 동안 분명 사나운 늑대들이 몰래 들어 올 것이니, 아니 벌써 저기 문 밖에 와 있으니, 저기 저렇게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아버지께서 이 양들을 꼭 지켜 주십시오. 저 늑대들에게 이 양들 중에 한 마리도 잃지 않도록 지켜 주십시오. 내 양들은 저 늑대들에게 속하지 않았으니, 아버지께서 보호해 주십시오.”


사랑하는 양들을 뒤에 두고 먼 길을 가는 목자의 마음, 그리고 목자의 기도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 앞에 선 우리의 엄마, 목자, 그리고 주님이신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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