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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Sep 29. 2022

집으로 가는 길

사도행전, 그리고 교회다움 (17-1)


“. . .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과 발을 묶고서 말하였다. ‘유대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허리띠 임자를 이와 같이 묶어서 이방 사람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고,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히 만류하였다. 그 때에 바울이 대답하였다.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우리의 만류를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우리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하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거기서 며칠을 지낸 뒤에, 우리는 행장을 꾸려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사도행전 21:11-15)


photo by noneunshinboo


1.        

친구 집에서 놀다보니 어느새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현관 문 앞에서 신발을 찾습니다.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하시던 친구 엄마가 부르십니다. 


“저녁 다 됐는데, 밥 먹고 가지 그러니?”

“아니에요. 집에 가서 먹을께요.”


참 이상합니다. 여기도 집인데, ‘밥은 집에 가서 먹을께요’ 합니다. 친구 집은 집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우리 집보다 훨씬 크고 넓고, 장난감도 많고 과자와 사탕도 많고, 게다가 친구 엄마도 너무 잘해 주십니다. 그렇게 없는 것이 없는데도 친구 집은 집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사실 아무리 친구 집이 좋아도 우리 집이 아닙니다. 아무리 크고 넓고 없는 것이 없어도 거긴 남의 집입니다. 우리 엄마 우리 아빠가 계신 우리 집, 우리 형이, 그리고 동생이 나를 기다리는 우리집이 아닙니다. 

그래서 집이 아닙니다. 그저 잠깐 있는 곳, 머무는 곳, 들르는 곳입니다. 그래서 집은 우리가 있어야 할 곳, 엄마 아빠가 계신 곳, 형제자매가 기다리는 곳, 그 곳이 집입니다. 내 집, 우리 집입니다. 


그렇게 친구 엄마의 밥 먹고 가라는 말을 뒤로 한 채, 집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늦가을이라 그런지 벌써 해는 져 어둑해졌습니다. 분명 아는 길인데, 자주 왔던 길인데, 처음 길처럼 느껴집니다. 

좀더 일찍 나올걸. 예전 골목길에는 겨우 전봇대에 매달린 전등불이 고작이었습니다. 그 골목이 그 골목같고, 그 집이 그 집 같습니다. 개도 짖고,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도 않았는데, 이러다 금새 깜깜해질까 겁이 납니다. 분명 아까까지 친구와 뛰어놀던 놀이터인데 오히려 더 무서워집니다. 밤마다 죽은 애기귀신이 나온다고, 애기 우는 소리가 밤마다 들린다고, 검은 고양이들이 몰려다닌다고 했던 그 친구 말이 생각이 납니다. 

혼자 ‘집으로 가는 길’은 어린 꼬마에게는 무척 ‘험난한 길’입니다. ‘집 떠나 고생길’입니다. 


2.        

여기 집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하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길을 가고 있는 바울과 그 일행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반갑게 맞고 또 슬프게 떠나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있습니다. 집으로 가는 사람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바울과 그 일행들은 지금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금 자기들을 반갑게 맞았던 사람들, 떠나지 말고 그냥 여기 같이 있자, 같이 살자 하는 여기도 집은 아닙니다. 


“그냥 여기서 밥 먹고 가라.” 

예루살렘까지 갈 것 뭐 있나며, 그러지 말고 우선 밥이나 먹자고, 먹고 좀더 있다가 가라고. 그러다 정들면 그냥 여기 우리와 같이 살자고, 바울의 바짓가랑이 부여잡고 꼬드기고 말리고 설득하고 애원하는 또 으르는 사람들을 뿌리치는 바울입니다. 


“집에 가서 먹을께요. 그냥 집에 갈께요.” 

바울이 지금 친구와 친구 엄마를 뒤로하고 밥 먹으러 집에 간답니다. 그렇다고 지금 가고 있는 그 예루살렘도 집은 아닙니다. 여기 친구 집도, 그리고 거기 예루살렘도 우리 집은 아닙니다. 


3.        

“거기서 무슨 일이 닥칠지,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니 제발 가지 마십시오. 아니 적어도 그 사람들이 당신을 환영하진 않을 것이라는 것만은 우리가 잘 압니다. 그만 여기서 멈추시고, 우리와 함께 계십시오. 성령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거기 예루살렘 사람들이 지금 허리에 두르신 그 띠로 사도님의 손과 발을 꽁꽁 묶을 것입니다. 그들이 던진 돌에도 맞으실 것이고, 매도 맞으실 것이고, 옥에도 갇히실 것이고, 그러다 죽으실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령께서 그렇다고 하시잖습니까? 바울 사도께서는 제발 우리를 보아서라도 가지 마십시오.”  


바울을 못가게 붙잡는 이유입니다. 충분한 이유입니다. 성령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일러 주셨습니다. 고집은 피울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그만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포기하고, 혹시 나중에 좋은 시절이 오면 그때 가면 된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냥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사람들이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질투나 시기 때문도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존경입니다. 이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아주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굳이 예루살렘으로 가겠다고 하는 것이 외려 이상합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또 잃고 싶지 않습니다. 바울을 잃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이번만은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여기도 바울 사도가 할 일은 많습니다. 아직 바울 사도가 가르칠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합니다. 성령이 무슨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우리 같은 믿지 못할 그런 사람도 아니신데, 여기 두로에서 만난 제자들은 성령의 지시를 그렇게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가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 바울은 그 성령의 지시를 받아 예루살렘으로 한창 가는 길입니다. 그냥 가는 길에 잠깐 여기를 들른 것 뿐입니다. 다 와 갑니다. 그렇다면, 거기 제자들에게 지시하신 성령과 바울 사도에게 지시하신 성령은 서로 다른 성령일까요? 

‘예루살렘으로 가면 안된다’ 제자들의 편에 선 성령이 있고, ‘그래도 예루살렘으로 가야한다’ 사도 바울 편에 선 성령이 또 있고. 네 편과 내 편, 그렇게 편을 가르는 성령이신가요? 너에게 지시하시는 성령 따로, 나에게 지시하시는 성령 따로, 그렇게 너의 성령과 나의 성령, 따로따로 계신 성령이신가요?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요, 주님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신데. (에베소서 4:4-6) 그런데 왜 거기 제자들 따로, 바울 따로 그렇게 성령의 말씀을 다르게 받고 듣고 또 다르게 행동을 할까요? 왜 가는 길이 서로 다를까요? 그냥 서로 다른 것 뿐일까요? 아니면 어느 한 쪽이 틀린 것일까요? 잘못 들은 것일까요? 


photo by noneunshinboo


4.        

그것은 우리가 아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한 까닭입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되지 않은 까닭입니다. 우리가 같은 주님의 말씀을 같이 읽고 듣고 보는데, 그런데 우리 안에 장착된 필터가 너무 강력한 까닭입니다. 


우리가 처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고, 그 주님을 믿는 믿음도 하나고, 그 주님께 받은 사랑도, 그 주님께 드리는 사랑도, 그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서로를 향한 사랑도 하나인데. 그런데, 아직 그 받은 소망이, 그 믿는 믿음이, 그 주는 사랑이 그 길을 아직 제대로 찾지 못하고, 그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같은 한 분 성령께서 우리에게 똑같이 일러주셨는데, 그런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길로 가야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디가 우리 집이고, 그래서 어느 길이 집으로 가는 길인지를 우리가 분별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모른다 안 가고, 힘들다 고되다 안 가고, 나중에 간다 미루다 주저앉아 안 가고, 여기가 거기만 못할까 그냥 여기 있자 자리깔고 안 가고. 나도 안 가니 너도 가지 마라 안 가고. 그렇게 하나 둘 여기 모여 있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는 예루살렘에서 나는 고문과 고통 속에 죽을 것이다.” “아니 그걸 아시면서 가십니까? 가지 마십시오. 안됩니다.”

“너,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 . .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막 8:33-34)


언제 주님께서 집으로 가는 길이 쉬운 길이라고 하셨나요? 언제 성령께서 오시면 예전과는 달리 아주 새털처럼 가볍게 날 듯 쉽게 집으로 갈 수 있다고 하셨나요? 언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한 번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가 바랄 뿐 아닌가요? 


한 시인이 기도합니다. 


“나는 주님의 종이니, 주님의 증거를 알 수 있도록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 . .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시듯이 주님의 얼굴을 내게로 돌리셔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내 걸음걸이를 주님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떠한 불의도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 . . 주님의 종에게 주님의 밝은 얼굴을 보여 주시고, 주님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시편 119:125, 132-133, 135)


주님의 말씀, 주님께서 주신 율법, 주님의 영의 지시를 우리가 알 수 있도록 우리를 깨우쳐 달라고, 집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느 길이 맞는지 분별할 수 있도록 우리를 깨우쳐 달라고 기도합니다. 집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합니다.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 28:20)


그래서 십자가의 길, 주님의 길, 집으로 가는 길을 우리가 잘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당신의 영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그 말씀을 똑바로 알아 듣고, 그래서 우리가 그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깨닫고 깨우치고, 그래서 우리가 그 길을 제대로 갈 수 있도록, 잘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진리의 영으로, 지혜의 영으로, 분별의 영으로 오셨습니다.  (17-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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