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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Jan 26. 2023

입장(立場)의 동일함

마태복음서, 길 위에서 길을 가르치는 예수 (5-1)

함께 읽고 걷는 더 드라마, 예수의 길 떠난 가족


“그 때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말렸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 그제서야 요한이 허락하였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 때에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하였다.” (마태복음서 3:13-17)


Joachim Patinir - The Baptism of Christ


1.       회개의 세례, 그리고 예수 


참 난감한 요한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입장인데, 어떻게 주님께서 외려 저에게 세례를 받겠다 하십니까, 그것도 회개의 세례를 받겠다고 저에게 오십니까? 주님께서 회개가 필요한 무슨 죄를 지신 것도 아니실 텐데. 주님 왜 그러십니까?” 


낮은 제가 높으신 주님께 오히려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아야 할 처지인데, 어찌 제가 감히 주님께 세례를 줄 수 있겠습니까, 그 선 자리가 엄연히 다른데, 높음과 낮음이 분명한데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요한에게로 온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모두 죄인들입니다. 회개가 필요하고, 그래서 회개의 세례가 필요한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회개의 세례를 받겠다고 죄인들이 선 줄에 죄인인 듯 죄인처럼 서 계십니다.     


물론 요단 강을 찾았다고 다 그런 죄인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무슨 좋은 구경 있나 싶어, 예루살렘에서 요단 강으로 관광객처럼, 혹은 관객처럼 구경 나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난 죄인이 아니다, 난 의인이다, 그런 죄인들의 무리에 난 섞일 수 없는 사람이다’ 저기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개중에는 나는 죄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중을 위해서 보험삼아 세례 정도는 미리 받아 놓는 게 좋겠다 싶어 세례를 받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그래서 이렇게 요한에게서 욕만 얻어먹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정말 왜 거기에 가셨을까요? 다들 받으니 일단은 받아 두겠다, 설마 그래서 가셨을까요? 아니면, 정말 예수께 고백하실 어떤 죄가 있으셨을까요? 설마 사람으로 오신 이유가 하늘에서 지으신 어떤 죄 때문에, 그래서 이 땅을 유배지로, 그래서 죄 갚음을 위해서 오신 걸까요? 그래서 나중에는 십자가까지 지게 되신 걸까요? 




2.       의를 이루기 위해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 (3:15)

“이렇게 해서,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


예수께서 고백하실 죄가 있어 회개의 세례를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의’를 이루기 위해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누구의 ‘의’를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의’는 무엇일까요? 


“. . .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 . .”  (고후 5:18)

하나님의 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 바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 ‘화해’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회복’입니다. 잃은 양이 목자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 집 나갔던 자식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려는 일, 즉 우리를 살리는 일,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하시기 위하여 거기 요단 강, 거기 회개의 강 가에 우리와 함께 우리가 받는 회개의 세례, 죄인들과 함께 그 죄인들이 받는 회개의 세례를 받겠다고 낮은 자로서 거기 서 계십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3.       핑계는 말고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그 얘기로,  넌 핑계를 대고 있어. 내게 그런 핑계를 대지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니가 지금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 혼자 남는 법을 내게 가르쳐준다며 농담처럼 진담인 듯 건넨 그 한마디. 안개꽃 한다발속에 숨겨진 편지엔 안녕이란 두 글자만 깊게 새겨 있어. 이렇게 쉽게 니가 날 떠날 줄은 몰랐어. 아무런 준비도 없는 내게 슬픈 사랑을 가르쳐준다며, 넌 핑계를 대고 있어. 내게 그런 핑계 대지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니가 지금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


가수 김건모의 <핑계>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여자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녀가 대뜸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혼자 남는 법을 가르쳐 줄께. 슬픈 사랑이 뭔지, 진짜 사랑이 뭔지 내가 오늘 가르쳐 줄께. . . . 우리 헤어져. . . . 우리 웃으면서 헤어져. . . . 나를 웃으며 보내주면 좋겠어.” 

핑계입니다. 헤어지자는 말을 애써 돌려 말한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떠났습니다. 남자는 그러나 그 자리를 떠나질 못합니다. 왜 헤어져야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남자는 그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남자가 무엇보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웃으며 헤어지자는 그 여자의 말입니다. 어떻게 웃으며 헤어질 수 있을까? 어떻게 웃으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녀는 그렇게 쉽게 떠날 수 있을까? 


“내게 그런 핑계를 대지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니가 지금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 

남자는 묻고 싶습니다. 헤어진 이유, 여자가 떠난 이유도, 왜 웃으며 떠나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거기를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와 여자가 헤어진 이유는 정말 무엇일까요? 




4.       입장(立場)의 동일함 


‘put yourself in someone else's shoes’라는 영어 표현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본다, 역지사지(易地思之)입니다. 처지(處地)나 입장(立場)을 바꾸어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쉽지 않습니다. 남의 신발을 신는 것은 사실 영 불편한 일입니다. 남의 신발에 내 발을 잠깐 넣었다 빼는 정도가 아니라 그 남의 신발을 신고 돌아다니는 것은 무척 불편한 일입니다. 만약 그 신발의 사이즈가 너무 다르고, 그 생긴 모양도 영 다르면 그 남의 신발을 신는 것은 그냥 불편을 넘어 곤욕이고 때론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신던 신발을 그냥 신는 것이 내 속에도 내 발에도 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입장을 바꾸기 보다는 오히려 내 입장을 고수하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남의 입장에 서는 것은 나의 입장의 편안함과 안전함을 포기하지 않는 한에는 불가능합니다. 


어떤 곤란한 문제나 상황에 처하거나 위기가 닥치고, 그래서 그것에 대해 시민들에게 설명을 해야 하고 답을 줘야 하고 또한 결정을 해야 할 시점이면 정치인들은 보통 이렇게 말합니다. 

“우선 입장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입장이 정리되는 대로 발표하겠다.” 

그리고는 사라집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사실 그들이 했던 그 모든 말은 그저 말일 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실은 그때 이미 그들의 입장은 서 있었고, 그저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나의 입장은 이미 서 있다, 전과 마찬가지로 확고하다, 딱히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입장(立場)은 말 그대로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입장을 정리한다는 말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조금 어수선하고 흐트러지고 어질러지고 한 듯 보이니 치울 것은 치우고 모을 것은 모으고 버릴 것은 버리고 해서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더 확고하게, 굳건하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선 자리에서 이리저리 조금씩 비켜가며 쓸고 닦고 치우고 해본들 크게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딱히 새로운 무엇이 나올 게 없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나의 입장을 정리하려면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벗어나야 합니다. 지금 내가 선 자리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때로는 아예 내 입장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 봐야 합니다. 자리를 바꾸어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의 자리에 서서 내가 그 사람이 되어 그 사람으로 보고 생각하고, 그래야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되어 나를 보아야 합니다. 그 때에 나의 입장, 나의 서 있는 자리는 비로소 정리가 될 것입니다. 


만약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겠다 한다면, 먼저 그 사람을 알아야 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나는 그 사람이 지금 서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어느 만큼 나는 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대신 내 자리는 그 사람에게 내줘야 합니다. 나와 그 사람의 서 있는 자리, 서로 다른 자리, 그 서로의 입장이 그래서 조금씩 좁아지고 같아져 갈 때, 비로소 서로에 대한 이해는 자라고, 비로소 사랑도 피어나지 않을까요? 내가 서 있는 자리와 너의 서 있는 자리, 그 서로의 입장의 동일함이 곧 공감이고, 그 공감이 연대감이고, 그리고 거기 사랑이 자라지 않을까요? 


Rene Magritte, The Red Model, 1937, Rotterdam, Museum Boijmans Van Beuningen


5.       신, 발, 그리고 사람 


입장을 바꾼다는 것, 즉 남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남의 신을 신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발이 되어 그 사람으로 걷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신발 속에 내 발가락이 자리를 잡고, 그 신발이 내 발이 되어 내가 걷고 뛰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 신발이 주는 불편함을 내가 느끼고 알아가고, 그 신발의 주인이 겪는 아픔과 고단함이 내 것이 되고, 그래서 그 신발의 주인을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그 신발의 주인의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금 여기 요단 강가를 찾으신 이유는 바로 거기 모인 사람들이 강가에 벗어 놓은 그 많은 신발들에 당신의 발을 넣기 위해서입니다. 그들 중의 한 명이 되어 그들의 신발을 신고 걷기 뛰고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로 오셨다는 그 성육신의 신비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신발, 죄인의 신발을 신으셨다는 것, 즉 ‘입장의 바꿈’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하나님께서 우리와 입장이 같아지셨다는 것, 그 입장의 동일함은 그래서 그냥 신발 매장에 들러 이 신발이 내 발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 잠깐 신었다 벗는 신발 쇼핑이 아니라, 우리의 신발을 신으셨다는 것에 멈추지 않습니다. 아예 주님께서는 우리가 신고 다녀야 할 우리의 신발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신발을 신고 걷는 ‘길’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발을 신는 것이고, 그 신발을 신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발을 신고, 그리스도의 몸을 입고, 그리스도께서 걷는 길을 따라 내가 걷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것이 또한 성육신의 신비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놓고 싶지 않고 떠나고 싶지 않은, 나에게 편안하고 안전하고 확실해 보이는 나의 입장, 그 내가 서 있는 자리를 과감히 버리고 떠나, 낮고 낮은 곳, 그 죄인들의 무리 그 한 가운데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입장, 그 주님께서 서 계신 자리에 내가 서는 것, 그리고 그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 그것이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5-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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