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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Jan 06. 2023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그 사이

마태복음서, 길 위에서 길을 가르치는 예수 (4-2)

함께 읽고 걷는 더 드라마, 예수의 길 떠난 가족


“그들은 왕의 말을 듣고 떠났다. 그런데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 앞에 나타나서 그들을 인도해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 그 위에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무척이나 크게 기뻐하였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서,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서 그에게 경배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보물 상자를 열어서,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리고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다. 박사들이 돌아간 뒤에,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니,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해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요셉이 일어나서, 밤 사이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말씀하신 바,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마태복음서 2:9-15)


Starry Night, Van Gogh, 1889


1.       내려놓는 여행, 짊어지고 가는 여행 


흔히 인생을 여행에 비유합니다. 여행을 통해 갖게 되는 가장 큰 기쁨을 느낄 때는 여행을 떠나기 전의 나와 돌아온 후의 내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나 뿐만 아니라 가족도 친구도 알아챌 때입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과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의 상황과 조건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오히려 더 나빠졌는데, 그런데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그 상황과 조건이 다르게 보인다면, 새롭게 보인다면 그건 분명 내가 많이 달라졌다는 뜻일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장했다, 성숙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검게 그을린 얼굴과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데도 불구하고 눈이 조금은 깊어진 듯도 싶고 맑아진 듯도 싶고, 왠지 입가에 미소가 보인다면 분명 그 사람의 속 안이 건강해졌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분명 조금은 달라진 일상을 꾸려갈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사람은 여행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경험했길래 그럴까요? 무엇이 그 사람을 변화시켰을까요?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서,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서 그에게 경배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보물 상자를 열어서,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2:11) 

바로 아기 예수입니다. 그들은 마침내 그 긴 여행의 이유와 목적인 새로 나신 유대인의 왕, 아기 예수를 만났고,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여태껏 짊어졌던 모든 것들을 다 그 아기 앞에 아낌없이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여행을 통해 갖게 되는 가장 큰 실망감은 여행을 떠났을 때의 나와 여행에서 돌아온 내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 뿐만 아니라 남들도 발견할 때입니다. 


“여행을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아마도 그는 자기 자신을 짊어지고 갔다 온 모양일세.’” (몽테뉴, <수상록>)

‘여행을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사람이 있다.’ 이 말은 우리는 무언가를 얻고자 여행을 간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투덜거렸나 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여행에서 돌아온 이유가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무엇을 얻고자 여행을 간다는 것은 무엇을 버리기 위해 여행을 간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는 손이 두 개입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내 손에 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남의 손을 마냥 빌릴 수는 없습니다. 힘들다 지쳤다 헉헉거리는 가족의 배낭을 대신 들어 주기는커녕 내 배낭도 들기 힘겹고, 쓰러져 걷지 못하는 친구 업기는커녕 내 등에 나를 짊어진 나이면, 무엇을 얻기 어렵습니다. 

어깨에 맨 내 배낭도, 내 등에 짊어진 나도 너무 무겁고 버거운데 어떻게 가족이든 친구든 남의 배낭 들어줄 것이며, 남을 내가 업어줄까요? 내 손에 든 것, 내 손이 움켜쥔 것이 가득인데 어떻게 무엇을 더 쥐고 잡을까요? 


그래서 이래저래 여행을 간다는 것은 꽉 쥔 나의 손을 푸는 것이고, 내 무거운 등에서 짐을 내려놓는 일인데. 아마도 여행을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그 사람은 여행을 가서도 그동안 그토록 짊어졌던 그 짐들을 거기에 내려놓지 못하고 끙끙거리며 다녔을 것입니다. 오히려 여행으로 인한 피로와 고단함만을 더 얹은 채 여행에서 돌아온 것이 분명합니다. 


여행 기간 내내 자기 머릿속에서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짐들을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어깨 위에 차곡차곡 더 높이 쌓아 올려놓으며 여행을 다녔는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모자라 들고 이고 끌고 여행을 다녔는지도 모릅니다. 

여행자가 아니라 짐꾼으로, 여기저기의 경치 좋은 산들을 등산객이 아닌 셰르파로 올랐는지도 모릅니다. 여행에서 잔뜩 얻어 돌아오기는 했는데, 그게 죄다 걱정과 근심과 불안의 짐들 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더 해야 할까, 무엇을 더 얻어야 할까, 나는 어떻게 해야 저기에 오를까, 무엇을 더 해내야 할까, 나는 무엇을 더 가져야 할까, 그런데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 . . 그래서 생기는 걱정과 근심과 불안을 이고 지고 끌고 다니는 여행길은 ‘그래도 집이 최고야, 집 나가면 고생이야’라는 말 밖엔 더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그랬다면 여기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그 먼 길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굳이 모든 것들을 버려두고 아무 것도 없는 곳을 향해 길을 나서진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랬다면 동방박사들은 거기 예루살렘에서 짐을 풀었을 것입니다. 

가져온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헤롯 왕에게 줘버렸을 것입니다. 아니 그걸 좋은 값에 팔아 예루살렘에서 부자로 살았을 것입니다. 고향으로 갈 것 뭐 있나 정붙이면 고향이지 하며 거기 예루살렘에서 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별이 빛나는 밤, 별은 내 가슴에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별이 머문 곳을 보았고, 또한 그 별이 사람으로 오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고향집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을 경유해 가지 않습니다. 갈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길로 갑니다. 별을 보고 별을 따라 그 길을 왔고 그래서 주님을 보았고 주님을 경험했고, 그리고 주님을 알았고 또한 믿었던 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으로 갈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떠나 온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하늘에 뜬 별을 보고 가는 길이 아닙니다. 가슴에 별을 담고 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별을 본 사람으로, 새로 나신 왕을 본 사람으로, 그 별을 가슴에 품은 사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제 고향집을 베들레헴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와 함께 자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씨앗이 심겨진 사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거기 고향 사람들,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에게 자기들이 본 것, 들은 것, 경험한 것 죄다 풀어놓으며 빛을 본 사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은 어둔 밤을 사는 이웃에게 빛나는 별이 될 것입니다. 


성탄의 밤과 아침을 맞았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별이 빛나는 밤, 4주간의 대림절, 그 기다림의 때를 함께 보내고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의 탄생을 함께 경험한 우리 신앙인의 삶입니다. 




아마도 동방박사들의 이후의 삶은 쉽진 않을 것입니다. 귀한 것 소중한 것 죄다 짊어지고 가서 그 아기 예수 앞에 다 내려놓고 왔으니, 당장 내일이 걱정스러울지도 모릅니다. 동방박사들의 직업이 또한 직업인지라 별을 보고 점을 치고 남들의 길흉화복을 말하고. 아마도 그 일을 그들은 한 동안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너무 큰 별을 보아버렸습니다. 여기저기서 ‘내가 별이다’, ‘아니다 내가 진짜 별이다’, ‘아니다 이게 진짜 별이다’ 하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반복하는 수많은 별들에 그들의 눈이 그들의 마음이 갈 턱이 없습니다. 이미 그 너무 큰 별을 보았고, 그 별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도 눈으로 보았고, 이젠 그 별을 가슴에 품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그 분이 유대인 뿐만이 아니라 나의 왕이시고 또 온 세상의 왕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란 것을 이미 알아버렸으니, 아마도 동방박사들은 더 이상 별을 보고 점을 치며 살아가기는 그리 쉽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 어두운 밤을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는 것이 어둡지만 그렇다고 어둡게 살진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별이 빛나는 밤을 살게 될 것입니다. 때론 별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아도, 이미 그들의 가슴에는 큰 별이 담겨 있으니, 그들은 어둔 밤을 낮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어둔 밤을 살아낼 소망이 있고, 어둔 밤을 견뎌낼 믿음이 있고, 어둔 밤의 빛으로 사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그 아기를 가슴에 품었기 때문입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3.       2023년, 무엇을 얻어 돌아오게 될까? 


“그리고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다.” (2:12)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여행을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한 사람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여행을 통해 큰 것을 얻은 사람을 살 것인가?” 


우리는 여행에서 돌아와, ‘역시 내 집이 최고야, 집 나가면 고생이야!’ 하며 나머지 삶도 여행을 떠나기 전과 같은 삶을 살까요? 시간이 나는 대로 산으로 들로 다니며 어디 새로운 별이 뜨지는 않나, 연신 망원경만 찾을까요? 혹시 찾던 파랑새가 사실은 내 집 처마 밑에 있지 않을까, 어제도 오늘도 처마를 떠나지 못하고 있을까요? 

비록 여행이 한 번에 나를 통째로 바꾸진 못해도, 조금은 어제와는 바뀐 사람으로 살까요? 아기 예수를 본 사람으로 살까요? 진리를 본 사람으로, 진리를 믿는 사람으로 살까요? 동방박사들처럼 별은 사라져 없고 도시의 불빛만 가득한 거기로 돌아가길 거부하고, 예루살렘을 우회해서 다른 길로 갈까요? 아기 예수를 품은 사람으로 길을 갈까요?    

아니면, 여행을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한 사람으로 살까요?


4.       가깝지만 먼 거리 8킬로미터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그 거리는 크지 않습니다. 멀지 않습니다. 그 거리가 실제로 5마일, 즉 8킬로미터라고 합니다. 아주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 거리는 가깝지만 그 살아가는 삶의 결은 너무 다릅니다. 


한 쪽은 별이 빛나는 밤이 있는 그러나 조금은 어둡고 불편한 삶이고, 다른 한 쪽은 별이 사라진 밤, 그러나 별 없이도 밝고 화려한 밤이 있는 삶입니다. 한 쪽은 별을 보고 그 별을 따라 가는, 그래서 막막하기도 한 그래서 쉽진 않은 삶이고, 다른 한 쪽은 내가 만든 별을 보고 내가 하늘에 띄운 별을 따라 사는, 그래서 조금은 확실하고 그래서 조금은 쉽고 편안한 삶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그 사이에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예루살렘은 저기 지척에 있고. 그러나 내가 가야할 곳은 거기가 아니라 오히려 작고 초라한 저기 베들레헴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방금 구유에 있던 아기 예수를 보았는데도 우리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와 그 가족은 곧 이집트로 도망을 갈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중에 이집트를 떠나 여기 베들레헴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나사렛, 갈릴리로도 갈 것을. 그리고 먼 나중에는 장성한 예수로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화려한 왕이 아닌 태어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초라한 죽음을 맞기 위해 거기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여기 이 아기 예수를 따라가야 할까, 말까, 고민합니다. 갈등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그 어딘가에 우리는 자주 서성입니다. 겨우 8킬로미터의 거리를 두고 있는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그 거리는 그래서 참 먼 거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은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이고, 그래서 십자가의 길은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나를 짊어지고 베들레헴에 가서 거기 아기 예수 곁에 나를 내려놓고, 다시 아기 예수를 짊어지고 이집트로 갈릴리로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그게 십자가의 길입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5.       별이 빛나는 밤이 있는 여행자로 


신앙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은 그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 그 여행자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여기 별이 빛나는 밤, 그 밝은 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여행자의 삶을 살았던 바울 사도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쓰레기(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 .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7-14)


여행자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내가 잃은 것은 나요, 내가 얻은 것은 그리스도 예수이시니, 그 주님께 사로잡힌 나는 빛 안에 있어 어둡지 않을 것이다, 하여 그 길을 가는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여행자다.” 


사도 바울이 달려간 길은 주님이라는 별을 따라 걷고 그 별을 가슴에 품고 가는 여행자의 길입니다. 지금 여기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떠난 길이었고, 이제 다시 그 별을 품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2023년, 주님이라는 큰 별이 빛나는 밤, 그래서 그 별과 함께 있어, 그 빛을 내며, 그 별이 빛나는 밤과 낮을 함께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다음은 김남조 시인의 <새해 아침의 기도>라는 시입니다. 기도입니다. 



첫 눈뜸에 

눈 내리는 청산을 보게 하소서

초록 소나무들의 

청솔 바람 소리를 듣게 하소서


아득한 날에 

예비하여 가꾸신 은총의 누리

다시금 눈부신 상속으로 주시옵고

젊디젊은 심장으로

시대의 주인으로 

사명의 주춧돌을 짐지게 하소서


첫 눈뜸에 

진정한 친구를 알아보고

서로의 속사람에

기름 부어 포옹하게 하여 주소서


생명의 생명인

우리네 영혼 안엔

사철 자라는 과일나무 숲이 

무성케 하시고

제일로 단맛 나는 열매를 

날이 날마다 주님의 음식상에 

바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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